#소년1

열흘 전 쯤에 당신의 편지가 도착했지만, 오늘에야 열어보았습니다. 받는 사람은 제가 아니었지만요.

제 이름은 김은호이고, 열 일곱살입니다. 저희 집은 2층짜리 단독주택으로 두 가구가 살고 있습니다. 1층에는 신혼부부와 8개월된 여자 아기가 살고 있고, 2층에는 부모님, 세 명의 형들과 저까지 6명이 살고 있어요. 말하자면 이 곳에 사는 여자는 아랫층 아주머니와 아기와 저희 어머니뿐이죠. 하지만 어느 누구도 편지의 받는 사람인 명소현이라는 이름을 쓰지는 않습니다.

맞아요. 남의 편지를 열어보는 것은 법에 저촉됩니다. 수취인이 살고 있지 않으니 반송했어야 옳은 일이었지만, 비에 젖은 봉투가 반정도 열려 있던 것이 화근입니다. 돌려보내지 못하고 수일이 지나는 새, 몹쓸 호기심이 생겼거든요. 진심으로 고백컨데 몰래 살짝만 읽었다가 다시 봉하고 반송할 생각이었어요. 이건 진짜예요.

그런데 당신의 편지… 이야기는 도란도란하고, 너무 재밌었죠. 받는 이에게 바닷바람을 동봉해서 보낸다는 대목에서 저는 감동을 받았어요. 당신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죠. 저도 당신에게 이런 재밌는 편지를 받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릎쓰고 모두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초면에 지나치게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불쾌하시다면 제 편지는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셔도 좋아요. 하지만 혹시라도 제가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답장해 주실 수 있을까요?

추신 : 보내신 편지는 주인이 없는 것이라 죄송하지만 동봉하여 반송합니다..


#소녀1

답장이 늦었어요. 처음엔 답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뒤늦게 쓰게 됐어요. 저는 중학교 2학년이예요. 중학생이 고등학생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를 하겠어요? 그랬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답답해서 누구하고든 이야기 하고 싶어졌어요.

저는 신소영이고요. 몇 달 전까진 그 쪽이 사는 동네에 살았어요. 이사를 왔고, 전학도 했어요. 근데요, 예전 학교 친구들이 너무 그리워요. 지난 번에 돌려보내신 편지는 그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보낸 거예요. 저희 학교가 며칠 후에 수학여행을 가게 됐는데… 저랑 버스에 같이 앉아서 갈 짝꿍이 없어요…. 예전 친구들과 같이 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퍼요. 수학여행을 가기 전까지 갑자기 친구가 생길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편지로나마 말을 나눌 누군가가 있으니 마음은 편해졌어요. 고마워요.


#소년2

답장이 안 오는 줄 알았어요! 우편함에서 당신의 편지를 발견하는 순간 제 심장이 시속 100km로 낙하했습니다! 아, 촌스러운 표현이라 미안해요. 어떻게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어서요. 하지만 제 기대와 달리 당신은 조금 우울했네요. 어쩐지 편지를 받고 너무 좋아했던 일이 미안해졌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말을 하려니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지만, 절친이 있어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아요. 저는 실은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특별히 집이 불우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공부를 못해서 그래요. 어머니는 동네 창피하다고, 바깥에서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친구들도 그랬던 것인지… 뭐 당연히 중학교 때 가까웠던 친구들과도 멀어졌죠. 저라는 사람은 바뀐 것이 없는데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그렇다고 그게 불편하거나 싫은건 아니예요. 제 생활 영역안에서 또 새로운 친구를 만났으니까요. 이것 또한 특별한 경험인거죠. 저는 어쨌거나 김은호입니다.

소영님도 억지로 친구를 찾으려고 하거나, 외롭다는 감정에 집중하지 말아요. 버스를 기다리기가 힘들 때는 버스만 바라볼 때라고 누가 그랬어요. 좋아하는 것들을 공부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열 다섯은 진짜 멋진 나이거든요.


#소녀2

자꾸 고맙다는 얘기만 하게 돼요. 큰 위로가 됐어요. 히히… 저는 그 동안 수학여행을 다녀왔는데,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근데 너무 길고 재미가 없으니까 한 가지만 얘기할래요.

수학여행 마지막 날이었어요. 저랑 같이 앉아 가고 싶어하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맨 뒷자리에 앉았거든요? 길이 완전 막혀서 차가 움직이질 않아 따분한 상태였어요. 의자 뒷 쪽에 가방을 놔뒀는데 거기서 뭘 꺼내려고 하다가 고속도로에 줄지어 있는 차들을 보게 됐어요. 한 번도 그런 광경을 내려다 본 적이 없어서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어요. 때마침 바로 뒷 차 운전자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저씨가 미소를 짓는 것 같았어요. 저도 살짝 웃었다가 문득 가방 안에 연습장을 챙겨온 게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연습장을 펴서 두 쪽면에 걸쳐서 싸인펜으로 크게 ‘안녕하세요!’라고 썼어요. 잠시 후에 아저씨가 손을 흔드시는거예요. 진짜 깜짝 놀랐어요. 용기가 생겼어요. 다음 장을 펴서 ‘수학여행중’ 이라고 썼죠. 아저씨가 끄덕끄덕 하시더라구요. 저의 필담은 계속 됐어요. ’15세. 아저씨는?’, ‘회사원?’, ‘출장 가세요?’ 등등… 아저씨는 배우 박중훈을 닮은 26살의 젊은 청년이었어요. 저는 버스 저 앞에서 앉아 있는, 애인도 없이 매일 우리에게 시달리는 담임 선생님을 한 번 바라봤죠. ‘우리쌤 미인’, ‘곧 휴게소’, ‘오실래요?’… 너무 키득거렸나봐요. 평소에 저에게 관심이 없던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어요. 자기들도 필담 하고 싶다고 아우성이었어요. 제 연습장에서 지나간 필담을 보던 아이들은 야단이 났고, 한 명이 담임쌤을 모시고 가겠다고 자처했고요.

어떻게 됐냐고요? 선생님을 울려버렸어요. 이제 막 부임해서 여린 스물넷의 음악선생님이신데요… 아이들이 낯선 남자 앞에 자기를 세우자 너무 놀라서 우셨어요. 그리고는 감정을 막 수습하시더니만, 아이들이 짓궂어서 죄송하다고 아저씨에게 정중히 사과를 하시고는 버스로 돌아오셔서 저희에게 엄청 화를 내셨어요. 진짜 분위기가 엉망진창이었답니다… 흐유…. 선생님이 이 사실을 아시고는 연습장을 압수하시고,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뒤도 못 돌아보도록 금지하셨어요. 네, 그렇게 박중훈 아저씨와 우리 쌤의 미팅은 불발났어요.

대신에 제 존재감이 충만해져서 말을 걸어오는 친구들이 생겼어요. 이건 좀 기쁜 소식이네요. 그 뒤로 학교 생활이 조금은 괜찮아졌어요. 진짜 별거 아닌건데 너무 흥분해서 재미없는 이야기가 길어졌어요. 근데 저한테는 사건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