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2011년 2월 2일   |   by 아라

친구에게.

갑작스런 메일에 놀라지는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그동안 연락을 하지 않아서 이 메일이 몹시 어색하다는 것을 알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나니 당신이 생각났어요.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도
좋은 기억 한두 개쯤 더 만들 시간은 허락되겠지요.
좀 우울한 이야기죠? 그래도 이건 기억해주었으면 좋겠군요.

난 아직 죽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나중에 슬퍼해줄 생각이라면 지금은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해요.
웃는 얼굴로 만나러 와주세요. 내일 꼭 만날 수 있길 바라요.

메일은 짧고 충격적이었다. 그는 왜 갑자기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계속 혼란스러웠다.
익숙한 모습으로 나타날 생각이었다면, 평소 자주 찾던 곳에서
만나자고 했겠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변두리의 외딴 식당을 힘들게 물어물어 찾아오니
그 낯선 장소에는 이미 나를 기다리는 그가 있었다.

– 오랜만이네요.
– 그러네요. 오랜만이군요.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앉으라는 신호를 한다.
그렇게 우리는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내 머릿속은 온통 궁금한 질문으로 가득차서 짧은 적막도 아주 길게 느껴졌다.
얼굴이 까맣게 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얼굴의 그였다.

– 어디가 아픈거예요?
– 간암이랬나….. 그렇다는군요.
– 얼마나 안 좋은거예요?
– 아직은 시간이 있댔어요. 6월 13일.
–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이르군요.
– 안 그러면 지금 만날 명분도 없을 것 같아서.

그는 약간 부끄러운 듯, 눈을 바닥에 두고 수줍게 웃는다.
내가 좋아하던 표정. 지금까지의 어색했던 공기가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작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어쩔줄 몰라하고 있다.
때마침 가게 종업원이 무언가를 가져왔다.
다 식어서 온기가 없는데다 조금 불은 국수.

– 이거 기억나요? 그 해는 정말 국수를 많이 먹었는데.
– 그거 정말 맛없었죠.

국수 가락은 입안에 넣기가 무섭게 후두둑 끊어진다.
아직 씹지도 않았는데 면발은 벌써 뭉개지고 있다.
장마가 한참이던 그 해 여름에 겨우 찾아낸 식당의 국수도 정말 이렇게 맛이 없었다.

– 이렇게 다 불고 식은 국수를 꼭 당신하고 먹고 싶었어요.
– 맛없는 것도 추억하고 싶어서요?
– 맛은 모르겠고, 그 날의 기억이 좋아서.

뭉개진 식은 국수를 위장속에 꾸역꾸역 밀어넣고 식사를 마쳤다.
이런 식사를 다시 해보고 싶었다니 모를 사람이군.
저 멀리서 책을 보고 있던 종업원이 와서 그릇을 치워주고 식탁을 닦아주었다.
탁자에 햇볕이 든다. 까맣던 그의 얼굴이 더욱 탁해보인다.

– 세상이 좋아져서 이제는 죽을 날도 미리 알게 되는 군요.

그는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완전하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좋지 않나요?
– 완전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죽음앞에서는 누구도 완전하게 미련을 떨칠 수 없을 겁니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도요.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죠. 아무리 준비를 해도 끝날 것 같지가 않다는.

그가 왜 이런 변두리 식당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알 수 없는 조용한 여자.
음악소리도 없는 적막함. 특별할 것도 없는 메뉴와 맛없는 음식.
그 덕분에 손님이라고는 우리 두 사람뿐.

– 고양이는 잘 있어요?
– 루이 녀석은 새 주인을 만났어요.
– 왜…?
– 힘들지 않을 때 보내는게 낫지 않겠어요?
– 미안해요. 그런걸 물어봐서…
–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를 만나주고, 밥도 같이 먹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그 날의 허기를 달랬던 맛없는 국수를 기억하게 해준 얼굴을 다시 보면
  숙제 하나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나봐요.

그는 내 얼굴을 한 번 빤히 바라보고는 물을 들이켰다.
만나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다 물어볼 참이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 두 달쯤전에 뻐꾸기 시계를 샀어요. 그 때는 내가 왜 아픈지도 몰랐었죠.
  그런데, 6월 13일을 알고난 후부터는 뻐꾸기가 울 때마다 저걸 왜 샀을까 후회했어요.
  죽음을 재촉하는 전령처럼 생각이 되더라구요.
– 아아.. 저런. 시계는 어떻게 하신거예요?
– 하하하. 너무 짜증이 나서 배터리를 빼버렸어요.

오랜만에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보기 좋다.

– 그러니까.. 그렇게 말입니다. 지금은 모든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바뀌었어요.
  맛없는 식사도, 당신이 와 준 것도. 이렇게 흘러가는 모든 1초, 1초가…
– 당신과  더 많은 시간을 이렇게 보내고 싶었는데…
– 웃으면서 식사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식당 벽면에 낡은 신문기사가 너덜거린다. 각종 미디어가 극찬한 맛집.
너덜거리는 신문지처럼 내 머릿속을 들쑤시는 6월 13일.
이 모든 순간 순간이 영원처럼 길고 또한 찰나처럼 짧다.

– 전화하면, 남은 시간중의 얼마간을 또 저에게 써줄래요?
– 당연하죠.
– 참 짧네요. 인생이라는 거.
– 누가 할 소릴…

오늘 만나서 시간이 흘러가 버린 것처럼 탁자위의 햇볕이 절반쯤 사라졌다.
사라진 시간이 아쉬웠던 나는 햇볕이 드는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의 야윈 어깨에 기댄다.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고, 졸음이 쏟아지는 것 같다.
햇볕이 반토막난 탁자, 플라스틱 물컵 두 개가 시야에서 잠겨들었다.

– 꿈은 잠들고, 현실이 깨어나다. @A-RA.COM –

Recent Comments

  1. pyan

    응답
    2011년 2월 5일 @ 2:13 오후

    인상에 남는 글이네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 아라

      응답
      2011년 2월 6일 @ 11:00 오전

      아앗…! 좋아해주셔서 기쁩니다.
      생각하던 것을 막상 글로 옮기니 별로 인 것 같아서 고칠 곳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끔씩 연습을 해서 그런지 잘 안 느네요.
      더 연습하겠습니다…… (….); 댓글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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