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업 맨 (Setup Man)

2011년 3월 8일   |   by 아라
홈팀 선발투수인 김불운 선수는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8회 1실점으로 3:3 동점을 허용한 후 얼마간 페이스를 찾지 못했다.
더구나 사인이 맞지 않아 수비 실책으로 추가 1실점을 하고 만다.
위험하게 만루 상황까지 갔다가 8회를 힘겹게 정리했다.

오늘은 그만 던지자는 감독님의 만류에 자존심이 상해
조금 더 던져보겠다고 고집을 부려 9회에도 마운드에 오른다.
이제 마지막 이닝이다. 타자들이 잘 해주면 팀은 승리 할 수 있다.
불안한 마음을 잘 추스려, 첫 주자는 삼진으로 잡는다.

두 번째 타석에는 박또철 선수.
김불운 선수와 같은 해에 데뷔해 함께 신인왕 경쟁을 하던 타자.
김불운 선수는 도중에 부상을 한 번 겪었지만, 박또철 선수는 승승장구중이었다.
김불운 선수를 두세 명 줘도 살 수 있을까 말까 한 비싼 원정팀의 간판 타자.
최근에는 메이저리그에서 스카웃 제의가 온다는 기사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박또철 선수를 바라보는 김불운 선수의 눈빛이 흔들린다.
폭투. 공은 김불운 선수의 손을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치솟는다.
박또철 선수는 1루로 달려가고, 포수는 공을 잡느라 바쁘다.
주루코치의 무리한 지시로 2루를 향하던 박또철 선수는
곧이어 공을 수습한 홈팀에게  아슬아슬하게 아웃당한다.

홈팀 감독이 마운드에 오른다. 컨디션 난조에 폭투까지… 할 말이 없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는 더 이상 제구가 안되는 자신은 마운드를 내려가야한다.
김불운 선수가 내려간 마운드에 오른 구원투수 나행운.
상대 타자를 깔끔한 삼진으로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온다.
9회초가 끝났다.

드라마는 지금부터다. 9회말 홈팀의 타선이 폭발한다.
결국 홈팀은 7:4의 점차를 벌리며 승리를 챙긴다.
승리투수는 나행운.

” 인생에서 운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일까? “

전날의 경기를 보지 못해 스포츠 신문 기사로 경기 결과를 읽던 그가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라고 무신경하게 되묻자
그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던 어제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혀 흥미가 없던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그가 추가 설명을 한다.

” 9회까지 팔이 빠지도록 던졌는데, 순간의 컨디션 조절 실패와
  수비 실책으로 승리가 날아가버린 선발투수의 마음은 짐작이 되는데
  단지 0.1이닝을 투구하고 승리를 챙긴 구원 투수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어.
  미안함이 있을까? 당연하다는 마음일까? 전혀 짐작이 안되네. “

결과적으로 팀은 승리했지만 그 날 9회까지 공을 던진 선발투수는
승도 패도 얻지 못했고, 9회에 잠깐 투입된 셋업맨이 승을 챙겼다는 것이다.
선발투수에게 각별한 애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을 그가 지금
선수들의 심리 상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책을 한 번 털어낸다. 지금 그게 무슨 대수람.
책을 정돈해서 상자안에 차곡차곡 넣으며 그에게 대꾸했다.

” 그게 운하고 무슨 상관이야? “
” 신의 계략같아. “

그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내뱉는다.

” 45개중에 6개의 숫자를 맞출 확률이 지극히 낮음에도
  그 엄청난 확률을 뚫고 로또를 맞는 사람들을 봐.
  그런데 적어도 내 주변에는 없다는 얘기지.
  뭔가 계략이 있다는 생각 안들어?
  신이 인간을 만들고 삶의 길이를 결정하고 설계할 때
  무작위의 행운을 어느 정도 포함시켰을까 안 궁금하니? “
” 그건 오버 아냐? 과대망상도 병이라더라. “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는 신문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책상위에 쌓여있던 서류더미를 쓰레기통에 쏟아넣는다.
이내 꽉찬 쓰레기통에는 더 이상의 종이 뭉치들이 들어갈 틈이 없다.
서류더미는 내일이면 낡아버릴 스포츠 신문보다 더 하찮은 것처럼
쓰레기통에 박혀 아무렇게나 구겨지고 널부러져 있다.

” 게임이 끝난후의 이런 문서 나부랭이들이 무슨 의미람.
  회사라는 작은 왕국에서 나도 살아 남고, 프로젝트도 살아 남는 확률에
  컨디션 난조와 수비 실책의 시간이 찾아와도 프로젝트는 성공하기도 하지.
  다만 나는 분명 엔트리엔 있었는데… 승도 패도 챙기지 못한 김불운일지도 몰라. “

책 상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짐을 챙기다말고 신문을 보다가, 딴짓을 하다가,
이젠 아예 아무런 의욕도 없이 늘어진채 멍하니 앉아있는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뭔 책을 이렇게 많이도 가져다뒀담. 하고 혼잣말을 하다가
박스 테이프 뜯어내서 상자의 윗면을 봉했다.

” 형. 그거 알아? 관점에 따라서는 9회의 마지막 타자를 처리하는
  중간계투의 0.1이닝이 결코 편하진 않다는거. “
” 그 정도면 완전 편하게 승을 챙긴거지! “
” 형 말대로 운의 균형을 맞추는 절대자가 있다면,
  컨디션 난조를 극복하는 순간의 무게와 9회 0.1이닝의 부담의 무게를
  똑같이 계산했을 것 같아. 그래도 불공평한가? “
” 응. “
” 그럼 시간의 축을 길게 늘인 신의 계산으로 보고….
  오늘 불운의 무게와 같은 좋은 것이 있을 거라 믿자. “

그는 나의 말에 더 이상 대답 하지 않았다.
수년만에 백수가 된 우리 두 사람은 더 이상 프로젝트 얘기는 하지 않기로 한 지
72시간만에 전혀 상관없는 소재로 프로젝트를 입에 올리고 말았다.
휴일의 회사, 고요한 적막, 수 많은 짐 상자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직원이 아닌 그와 내가 있는 것이 기묘하게 어울리지 않는다.
엔트리에는 있었지만, 승도 패도 챙기지 못한 9이닝을 던진 두 사람의 주말이었다.

– 힘내요. 김불운 선수. 같은 무게의 행운이 인생 어디쯤에 있을거예요. @A-RA.COM –

Recent Comments

  1. IX.

    응답
    2011년 3월 10일 @ 12:34 오후

    아. 우리의 인생이구나. 아아..ㅠㅠ
    이 글은 읽기 편하네. 단숨에 끝까지 읽어내렸다.

    • 아라

      응답
      2011년 3월 10일 @ 2:53 오후

      절반이 스포츠인데 편하다니 별일임. ㅋㅋ
      역시 연습만이 살길이구나… 댁글 ㄳ

  2. pian

    응답
    2011년 3월 17일 @ 1:37 오후

    ㅎㅎㅎ 판정승을 거둔 프로젝트에서도 퇴사하면 롤스탭에서 지워지는게 인생인데요.
    (경험담입니다)
    차라리 스포츠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아서 좋네요.
    게임은 그냥 현재. 만 존재하니깐요.
    사실 퇴사한 사람을 롤스탭에 올려놓는 것도 웃기니까.. 게임이라는 서비스 라는 현재과정만 존재하는 것같아요.
    아… 사실 주제는 이게 아닌데, ㅎㅎ 아라님의 사소설적인 글 너무 좋아해요.
    애독자입니다. ^^ (이게 주제임;;; )

    • 아라

      응답
      2011년 3월 17일 @ 3:56 오후

      평소의 생각들이 여과없이 글에 투영이 되어서 부끄럽네요. ㅎㅎ
      ….아무래도 소재 부족인 것 같습니다…. (….)

      여러가지 일들로 더욱 더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가끔은 제가 게임 개발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ㅅ^);;
      고독한 쓰기연습에 따뜻한 응원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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