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에이전트 (Dr. Agent) – 1

퇴근길 전철역 계단에는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나오고 들어가고 있다. 출입구까지 나가는 길은 걸어간다기보다 휩쓸려 간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계단을 헛딛지 않으려 바닥을 보고 걸었지만, 앞사람에 가려 좁아진 시야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을, 더구나 인상착의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출구를 겨우 빠져나와 약속장소인 K어학원 간판을 찾아보았다. 50m쯤 떨어져 있을까, 간판은 떨어져나가고 벽면에 K어학원이라는 글자의 흔적만 남아 있는 건물이 보였다. 어학원 1층이라고 했는데, 이런 공사중인지 중단된건지 하는 곳에서 보자는거였나. 누군가의 장난일까? 아니면 어떤 무서운 일에 휘말린걸까? 눈치를 보면서 문앞을 서성였다. 슬슬 겁이나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1시간을 걸려 이 곳에 온 걸 생각하니 선뜻 돌아설 수도 없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결행하지 못할 일. 부탁을 못하게 되거나, 장난질을 당하거나 별 차이는 없었다.

기왕 왔으니 건물안에 들어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테이프가 발라진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명패가 덜렁거리는 수강 접수대, 먼지가 뿌옇게 앉은 탁자 하나와 녹슨 사무용 의자가 두어 개가 놓여있는 휑한 공간. 전기공사를 하느라 뜯어낸 천장 덕에 음산한 느낌까지 든다. 고개를 돌려 들어왔던 쪽을 바라보았다. 뿌연 유리문 바깥으로 보이는 퇴근길의 인파는 이 곳과 어울리지 않는 대조적인 광경이다. 끝없이 떠밀려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의자의 먼지를 털어내고 앉았다.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알 수 없는 사람과의 알 수 없는 거래. 불안한 마음으로 지갑속의 명함을 꺼내보았다.

 

해결사

김대리 : 010 – XXXX – XXXX

꼭 하셔야 하는 일에 다만 용기가 없어서 망설이고 계시다면 주저하지 말고 전화주십시요.
그것이 무슨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테니까요.
기회는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 이 기회 카드를 사용하지 않을시에는 반드시 폐기하여 주십시요.

반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깔끔한 느낌을 주는 이 명함에는 희미하게 Chance card라는 워터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명함을 다시 지갑안에 넣었다. 1분이 1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그가 오기전에 여길 빠져나가야 하나? 기다려야 하나? 마치, 간헐적인 치통에 시달리다가 통증이 잠잠해진 틈에 치과에 가는 기분이랄까. 치과 입구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그 짧은 시간의 갈등이 계속되는 것 같다. 불안은 온 몸에 스며들고 있었다. 잠시후, 뿌연 유리밖에 한 남자가 이 쪽으로 성큼 성큼 걸어오는가 싶더니 불쑥 문을 열고 들어섰다.

– 의뢰인이시죠?

말쑥한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 텅 빈 공간이라 그의 목소리가 울려 들린다. 먼 곳의 실루엣은 평범한 영업 사원같아 보였다. 뚜벅 뚜벅 발소리를 울리며 내 쪽으로 걸어온 그는 생각보다 더 젊었다. 가까이서 본 그는 이십대 중후반 정도의 나이에 첫 눈에도 호감을 가질만큼 선한 얼굴이었기에 불안했던 마음이 약간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 처음 뵙겠습니다. 김대립니다.
– 아, 네… 안녕하세요.
– 약속장소가 이래서 놀라셨을겁니다.
  일의 보안상 눈에 띄지 않기위해 일부러 혼잡한 역을 골랐는데, 그러다보니 막상 이야기를 나눌 곳이 마땅찮더군요. 이 곳이 아무래도 보수공사중이라 아무도 없으니 최적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준비된 답을 쏟아내는 그의 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캐묻는다면 무기력한 나는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내가 앉은 맞은편 의자의 먼지를 털어내고 앉았다.

–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명함은 어떻게 얻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가 착한 눈웃음을 지어보이자 마음은 훨씬 안정이 되었지만, 오히려 머릿속은 백지가 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아, 저런. 너무 긴장하셨나보군요.
  겁먹지 마세요.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추궁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 주..주웠어요. 출근길에…
– 누군가 폐기하지 않고 바닥에 버린 모양이네요. 흠…
  뭐 그건 의뢰인님의 잘못이 아니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요.

그는 잠깐 턱을 괴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그렇다면, 정확한 설명서도 못 받아보셨겠군요?
– 네.

흐음하고 짧은 신음을 토해낸 그는 무언가 마음을 먹은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 제가 그동안 했던 일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사랑을 고백할 용기가 없는 분이라든가, 허락받을 일을 부모님에게 말씀드릴 방법을 모르는 분,
  화해하고 싶은 친구가 계셨던 분 등등이 있습니다. 모두 자신감 결여 상태였다고 볼 수 있죠.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명함만 보고 연락하셨다면 아마 저에게 용기를 얻을 일이 필요하셨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팔짱을 끼고 설명하는 그의 팔꿈치에 묻은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여유를 잃지 않는다. 나는 그의 정체와 이 거래의 목적이 궁금해졌다.

– 제가 아는 건…. 당신의 직함과 하는 일인데…
– 그렇죠.
– 제가 도움을 받으면… 비… 비용은 어떻게 계산하나요?

역시나 내 질문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품안에서 계산기를 꺼내들었다.

– 돈은 필요없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흥정하게 될겁니다.
– 시.. 시간이요?

시간을 어떻게 지불한다는 거지? 웬 미친놈에게 걸려 들었나? 그러기엔 너무 멀쩡하게 생겼고… 아까의 우려대로 단순한 장난일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 무엇을 의뢰하시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려운 것일 수록 많은 시간을 지불하셔야 할겁니다.
– 만약.. 응한다면 제 시간을.. 어.. 어떻게 지불하나요?

네 놈이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 시간을 가져갈 건지 한 번 얘기해보시지.

– 지불하는 것은 제가 늘 하는 일이니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을 지불하시게 되면 당연히 그만큼의 수명이 줄어들겠지요.
  내키지 않으시면 지금 그만두십시요. 명함을 돌려주시면 없던 일로 해드리죠.
  어떻게 하실건가요?

– 다시 고쳐쓰여질지 모르는 이야기 @A-RA.COM –

# 4월에 시작한 글을 12월에 고쳐 쓰게 되었습니다.
  원래의 생각에서 많이 벗어나서 어떻게 해야할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연습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적고 있으니, 역시나 편안한 마음으로 질타 주십시요.
  언제든 다시 고쳐질 글이니까요. ‘ㅅ’)

4 thoughts on “닥터 에이전트 (Dr. Agent) – 1”

  1. 잊고 있던 (회사 교육) 독후감이 저를 압박하고 있네요. -ㅅ-);;
    뒷 이야기는 아마도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요? (….);
    물론 기대는 버리시구요. ㅎㅎ

  2. 감사합니다. ^^;
    뜻밖에 회사 문제로 복잡한 일들이 발생해서 블로그에 와보지도 못했어요. ㅠㅠ
    너무 기다리시지 않게 하겠습니다. 재미도 없는 글로 허세부리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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