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식이 끝났다. 1학기 종료와 함께 내 우정도 끝났다. 세 명이 우정을 쌓으면 한 사람이 따돌려지기 마련인데, 사교성이 별로 없는 내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친구들의 절교선언은 세상이 끝나는 것만큼 어질어질한 기분이 들게 했다. 평생을 쌓아갈 우정이라고 해놓고 절교라니.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친구를 사귀는 일은 연애만큼이나 힘든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영화 ‘라붐’의 여주인공 ‘빅’처럼 청춘을 불사르는 열다섯이 되었으니,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 질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엄마가 억지로 보내는 보습학원과 방학숙제가 기다릴 뿐.

“여름방학 잘 보내.”

울것 같은 기분과 알 수 없는 분노속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채 하교를 준비하는 나에게 누군가 새 연필 한 자루를 내밀었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여드름 많고, 사각턱인 애. 김하정이다. 말도 엄청 느린 애다. 

“뭔데?”
“그냥…. 방학식 기념으로 주고 싶어서.”

그 애, 손 끝을 떨고 있다. 내 우정은 결단났고, 지금 엄청 기분이 별로라고…. 왜 이런 엉망진창의 방학식을 기념한다는거야? 게다가 그렇게 촌스런 그림이 그려진 연필을 대체 누가 쓴다는거야. 우린 중학생이라고…

“초딩이냐? 연필을 쓰게.”

연필을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마음이 파괴되어 이성이 마비된 나에게 이상한 말 좀 걸지 말란 말이야. 학교도, 김하정도 다 꼴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여름방학은 엄마가 이미 보습학원을 예약해둔 상태라 파괴된 우정같은걸 길게 붙잡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힌다. 우정이 휘발된 여름방학은 몹시도 건조하고 길었지만, 내 생활은 단조롭기 그지 없다. 어째서 영화 ‘라붐’의 여주인공 ‘빅’처럼 대단한 로맨스가 생기지 않는걸까. 우정이 부서졌으면 사랑이라도 찾아와야하지 않나.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학원을 마친 어느날 집으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나야. 김하정. 놀랐지? 방학 어떻게 보내고 있니? 궁금해서.
있잖아. 연필. 그거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서 준건데. 받지 않아서 조금 창피했어.
그런데 괜찮아. 남은 방학 잘 보내고 개학식날 보자. 안녕 …’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연필을 거절한 나의 바보같은 말이 떠올라서 괴로웠고, 내 마음을 속이고 동정심으로 친구를 사귀려니 더욱 괴로웠다. 답장을 몇 번이나 쓰다 찢었다. 이제 난 중학생이라서 연필을 쓰지 않는다고. 적어도 네가 그정도는 알아둬야 친구가 될 수 있는거 아니냐고. 우정을 쌓는 일이 연애만큼이나 어려운 이유는 연필을 받는다고 친구가 사귀어지는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고쳐쓰는 답장에 허세의 밤은 깊어갔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우정만이 파괴된 열다섯의 여름방학이었다.

–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문장은 전혀 나아지지 않네요.@A-R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