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9995211호의 소원

정월 대보름의 밤이었다. 특별한 일도 없었고, 외로운 기분이 들어 퇴근길에 맥주 두 캔과 새우깡을 샀다. 편의점을 나서는 내 발걸음을 보름달이 비추고 있었다. 저 달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었지만,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으니 그건 그저 마음의 위안에 가까운 허구일 것이다.

하지만 외롭다. 달에게라도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외롭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다시 달을 힐끔 바라보았다. 정말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늘 있는 일이지만, 빈 집에 혼자 들어가는건 익숙해지지 않는다. 당장 외로움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어차피 흘러갈 소원이라면 어디에선가 말동무 하나만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말동무 하나 내려주세요라고 중얼 거린다. 왠지 좀 머쓱하다.

“나 원참. 무슨 망상이람…”

현관 도어락을 연다. 아무도 없는 집의 싸늘한 냉기가 나를 반겨준다. 그리고 그림자도.

“어서와!”

집에 누군가가 있었다. 꺄악 하는 내 비명이 아파트 계단을 울린다. 맥주가 담긴 봉지를 떨어뜨렸다.

“환영인사 치고는 격렬하네.”

꼬마애처럼 작은 실루엣이 말했다. 저건 뭐지? 사람은 아닌데, 귀신인가? 아무리 외로워도 귀신하고 대화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어질한 기분이 잠시 스쳐가고, 정신이 들었다. 스마트폰으로 112를 누르면서 소리쳤다.

 “누구세요? 왜 우리집에 있는거죠? 당장 나가주세요!”

작은 그림자는 한숨을 쉬었다.

“…신고까지 하려고! 반겨줘도 시원찮은데 이거 너무 하잖아. 나 엄청 오래 기다렸는데…”
“통화버튼 누를거예요! 무기 같은거 갖고 있으면 버리고 당장 나와요!”
“얘 진짜 점입가경이네.”
“셋 샐때까지… 하나.. 둘…”
“아, 외롭다고 징징댈 땐 언제고!! 나라고 뭐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얘기 상대가 필요하대서 출장온거야! 그렇게나 싫어할 줄 알았으면 나도 안 왔어! 괴한 취급까지! 별 꼴이야!”

작은 그림자가 현관으로 나왔다. 센서등이 켜졌다. 작은 그림자는 색동조끼를 입은 흰 토끼였다. 분명 나보다는 작았지만 토끼치고는 무섭게 큰, 그러니까 다섯살 꼬마애처럼 커다랬다. 토끼는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으로 주섬주섬 현관을 나오더니, 들어갈 때 벗어놓은 듯한 신발을 신었다. 달걀만큼 작은 신발이었다. 그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로 투덜거렸다.

“잘해주면 이 모양이라니까. 인간들이란!”
“잠깐만요. 얘기 상대라니, 무슨 말이예요?”
“왜 나한테 물어? 네가 달보고 소원 빌었잖아.”

뭐? 그게 진짜 이루어졌단 말인가? 그래서 지금 내가 토끼와 대화를 하고 있는건가? 헛것을 보는 것인가 잠시 헷갈려온다. 전에도 이런 환영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귀신도 뭣도 아니야. 네가 알고있는 달토끼라니까..”
“정말….?”
“맹세코.”
“……”
“……”
“…..이..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정체불명의 토끼를 집에 들이는 것이 맞는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소원이 이루어졌다지 않나? 나는 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달토끼는 믿음을 회복해서인지 기분이 좀 풀린 표정으로 신발을 다시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파위로 깡총 올라 앉는다.

“그거 맥주야? 나도 맥주 좋아하는데. 내꺼도 샀어?”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그 자리에서 멍하니 달토끼를 바라보는 나에게 달토끼가 말을 건다. 손에 쥔 봉지를 내려다 보았다. 그래. 분명 두 캔을 사긴 했지만, 달토끼와 같이 마시려고 산 것은 아니다. 좀 더 취한 기분으로 빨리 잠들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네.”

거실 탁자 위에 과자 봉지도 풀어놓고, 맥주를 꺼내놓았다. 과자를 풀어놓는 나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는 달토끼.

“나 새우깡도 좋아해.”
“네. 그러셔요..? 근데 왜 자꾸 반말을 하실까?”
“너보다 300살은 많거든.”
“거짓말.”
“얘는 진짜 아까부터 짜증나게? 너 속고만 살았냐? 난 300년을 진실되게 살았다고.”
“300년 넘게 사신 분이 현대어도 엄청 잘 쓰시는구만요.”
“시대에 맞춰 사는게 얼마나 빡센건데! 300년을 살면서 출장 소원 도우미를 하려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해야하는줄 아냐? 넌 대충 사니까 알턱이 있겠냐마는… 아… 캔은 따서 줘.”

가지 가지 하시네요. 캔은 두 개 다 찌그러져 있었다. 이거 그대로 까면 거품 폭발이거든. 공부 많이 한거 맞아?

“맥주는 좀 이따 마셔요. ……근데요. 그게 말이 돼요? 무슨 출장 소원 도우미니, 달토끼니… 여태 정월 대보름마다 빌었던 소원이 다 이루어졌으면, 열 번도 더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달랑 방금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여태 말한걸 다 믿으라니 제가 뭐 산타 믿는 초딩도 아니고요….. 솔직히 지금 제가 외로워서 미친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는데….”
“……너 뭔가 착각하고 있구만?”

토끼는 색동 조끼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역시 세월이 지나도 메모는 종이에 쓰는게 짱이라니까… 어디보자… 1993년 소원인데?”
“네?”
“1993년에 ‘아무나라도 좋으니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말동무라도…’ 라는 소원을 빌었고, 그게 5789995211호 소원이야. ….너 그 때 왕따였음? 왜 친구가 없어? 고등학생이었나? …. 뭐…. 300살에겐 고딩이나 중년이나 그게 그거지만.. 아무튼 쫌 미안. 너무 밀려서 오래 걸렸네. 헤헤…. 맥주 이따 줄거면 새우깡 줘.”

어처구니가 없었다. 10년도 아니고, 20년이 지나서 소원 들어주러 왔다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과자 한움큼을 집어준다.

“그래도 소원을 빈다고 다 이루어지는게 아니라서…. 막 중간중간 폐기되고, 번호가 중복 발급되기도 하고, 유실되기도 하고… 개판이지. 데이터라는게 다 그렇지. 달나라라고 뭐 그렇게 기술이 좋은건 아니라서… 넌 운 좋은겨…”

– 자러 갈래요… 짧은 1부 끗 @A-R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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