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9995211호의 소원 -2

달토끼는 내가 준 과자를 갉아대며 먹었다. 떠들어대거나 과자를 먹거나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머릿속의 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너무하다. 물론 나는 조금전에도 우연찮게 20년전과 같은 소원을 빌었다지만 그렇지 않고 아무때나 소원성취가 발현되면 오히려 폐를 끼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응?”
토끼는 과자를 먹는데 정신이 없다. 배가 고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저에게는 필요없는 소원이면 어떻게 하실건가요?”
“어떡할게 뭐 있어? 헛수고 한거지. 아까처럼 인간의 변덕을 욕하면서 돌아가야지.”
“그런 헛수고는 드문 일인가요?”
“아니. 의외로 다반사야. 오히려 반겨주는 때가 드물지. 도와주려하면 필요없다는 식이야. 그래서 이 일이 너무 보람이 없어서 그만둘까 생각도 했다니까.”
“항상 늦어서요?”
“그건 좀 애매하네. 우주의 시간은 정확하다고 생각해. 이번의 경우도 늦긴했지만 너한테만 늦은거지 사실 난 제때 도착한거야. 그렇게따지면 우린 늦는법이 없어. 늘 적당한 때에 나타나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아까는 너무 늦었다면서요?”
“그래. 그게 네 입장의 이야기잖아. 이제 맥주 마셔도 될까? 목 말라.”
달토끼는 소파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내 옆에 앉았다. 아직 괜찮지 않아보였지만 수건으로 감싸쥐고 맥주를 땄다. 터져흐르는 거품의 얼마가 수건에 흡수되었다. 달토끼는 내게서 맥주를 받아들고 홀짝였다. 나는 별 말없이 앉아있었다. 달토끼도 얼마간 아무말없이 맥주만 홀짝이다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열 번도 넘게 나타났어야 할 내가 이제 나타난게 이상하지?”
“네…”
“작년 소원 기억나?”
“그냥 뭐… 아프지 않고, 직장에서 인정받고 싶다는거 였던 거 같아요.”
“이루어졌네.”
“….아닌데요.”
“보통은 자기가 다 가지고 있는걸 빌거든. 재밌지 않아? 스스로 할 수 있는걸 남한테 들어달라고 하고 있는게. 그렇게 비는건 소원이랄 수도 없지. 누구나 다 그런 인생을 살고자 생각하는걸! 그저 불행이 닥쳐오지 않게 해달라는건데 그건 우리 영역밖의 일이야.”
“그럼 도와줄수 있는 적절한 소원은 모호하지 않고 대중적이지도 않으면서 구체적이면 되는거예요?”
“뭐 그리 복잡한겨? 간절하면 돼.”
“건강하고 복된 삶을 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할 수 있잖아요.”
“그게 간절한 사람들은 시간을 더 가치있게 써. 건강을 위해서 애쓰고, 기도로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말이야.”
대화가 진척이 없는 것 같았다. 달토끼는 여전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노력해서 얻어지는건 소원을 빌어 얻어지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던가. 보통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신의 영역에 있어서 요행에 가까운 것이다.
“말동무 같은건 제 힘으로 어떻게 안되는거잖아요.”
“그러니까… 알려주러 온거야.”
달토끼는 맥주를 거의 다 마셨다. 그리곤 다시 과자를 갉아대기 시작했다. 약간 우물거리면서 더듬 더듬 말을 이었다.
“말동무 소원의 본질은 말동무가 아니야. 외롭다는 마음이지. 외로움의 크기는 달라도 누구에게나 있어. 보통은 잠깐의 외로움이 찾아와도 금방 그걸 깨고 나가는데 넌 그걸 잘 못했어. 외롭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안에서 나오려고 하질 않거든.”
“전 늘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어했는데요?”
“아니. 늘 혼자이고 싶어했어. 밥 먹는 것도, 귀가하는 것도 누군가 동행하면 즐거워하지 않았잖아.”
“그거야 마음에 맞는 친구가 아니었으니까요.”
“응. 이제 알겠지?”
“네? 알다니요?”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중에 너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네 자신뿐이다.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영혼의 단짝이 없는 기분은 남의 매력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아서야. 그게 외로움의 원천인겨.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만이 알지. 자존심때문일 수도 있고. 나르시즘일 수도 있고.”
달토끼는 색동조끼에 묻은 과자 가루를 털어내고 일어섰다. 앉아 있을 때도 작았지만 일어나도 여전히 작다.
“이루고 싶은게 있으면 본질을 봐. 허무맹랑한 바람이 아니라, 간절하게 얻으려는 것의 바닥 말이야…. 난 이제 가야겠다. 퇴근시간이야.”

달토끼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나도 일어나 달토끼를 따라갔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배웅이었다. 토끼는 예의 그 달걀만큼 조그만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아 혹시 오해할 거 같아서 한 마디 하자면….”
“네?”
“도우미는 목발과 같은거야.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에겐 목발이 무슨 소용이겠어? 소원을 이루어주는 사람은 자기자신이야. 그러니까 소원을 골백번 빌어도 내가 나타나지 않는게 정상이지.”
“……….”
“5789995211호는 진즉 폐기된 데이터였지. 네가 다시 같은 오더를 내려서 복구된거야. 네 자신은 알고 있을걸. 말동무를 위해서 맥주를 샀기에 기쁜 마음으로 온거야. 잘 마셨어. 네 덕에 오랜만에 실적 달성도 하고… 자 그럼….”
토끼는 조끼 주머니의 종이를 꺼내어 확인하고는 다시 접어 넣었다. 그리고 마치 유령처럼 흐려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꿈을 꾼 사람처럼 현관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었다. 시원하기도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뻔한 소리를 하다니…. 나는 여전히 꿈을 꾸는 것인가?
탁자는 여전히 흐트러져 있고, 달토끼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는 바닥 사방에 흩어져있었다. 그래도 조금전의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정말로 누군가와 대화가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나는 환상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거실 조명을 뚫고 창밖의 달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유령이건, 허상이건, 실제로 본 것이었건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올 해 정월대보름의 소원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제법 괜찮은 한 해가 시작되었다.

– 끝. @A-R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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