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왕은 공주를 웃게하는 사람을 부마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기사가 되려고 수련하던 남자도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곧 검수련을 그만두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수집하느라 애를 썼다. 노력끝에 남자는 술집의 모든 이를 웃길 수 있을만큼 재미있는 사람이 되자 드디어 궁에 갈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궁에 당도하여 공주를 웃겨보겠노라고 말한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괜찮다. 오늘 아침에 공주가 그냥 웃더라고. 그래도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으니… 여봐라. 저 자에게 차비라도 챙겨줘라.”

그녀는 옷에 붙은 보풀을 뜯고 있다. 머리도 약간 헝클어져 있고, 억지로 한 화장은 들떠있다. 나라고 열심히 차려 입고 나온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녀의 낡은 차림이 우리의 연애가 낡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싫을 때가 있다.

“재미없어? 내 얘기?”

“아.. 어디까지 말했더라?”

“세계가 둘로 나뉘어져서 똑같은 사람이 살아갈지 모른다는 가설까지…”

“응. 계속 얘기해.”

그녀는 식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들어줬으면 좋겠지만 그런 기대를 하면 안된다. 벌써 오래된 일이다. 애써 이야기를 해봐야 응수해주는 법이 없으니까, 나 역시도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그만이다. 상관없다.

“영화 시작 시간 다됐는데, 미리 일어날까? 팝콘 먹을래?”

“그럴까?”

처음의 그녀는 영화 데이트가 제일 시시하다고 했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제일 한심한 데이트라고. 그녀는 내 자취방의 오래된 보일러처럼 미지근하기만 하다. 아니, 우리의 연애가 미지근해졌다고 해야하나…..

그녀와 카페에서 보내던 시간은 길기만 했는데, 영화는 순식간에 끝났다. 우리는 영화를 조금 아쉬워하며 나왔다. 그녀가 먼저 말을 떼었다.

“재밌네.”

“응. 그러게.”

싸운 것도 아닌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정적이 흘렀다. 내 머릿속은 온통 영화장면으로 꽉 차 있다. 이렇게 저렇게 한 이야기를 오늘 페이스북에 올려야지… 그녀가 다시 말을 걸었다.

“밥은 집에서 먹을건가?”

“먹고 갈래?”

“그러자.”

밥을 같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집에서 혼자 챙겨먹으려면 너무 귀찮은 탓이다. 그건 아마도 그녀도 같은 마음이겠지. 우리는 더 이상 맛집을 가지 않고 그저 허기를 달랠만한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따라들어온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제 묻지도 않네?”

“뭘?”

“맨날 여기잖아!”

“왜 그래? 새삼스럽게…”

“새삼스럽게? 그래.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아줬게? 어떻게 한 번을 뭐 먹고 싶냐고 묻지도 않냐?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녀가 흥분한다. 끼어들 틈이 없는 말을 쏘아 붙이고 씩씩대는 동안 나는 어쩔줄을 모른다. 늘 괜찮았잖아..? 오늘 왜 갑자기 그러는거야? 언제 새삼스러워야하는지 난 잘 모르겠다.

“벙어리니?”

“아니.. 미안해. 생각을 못했어. 담엔 물어볼게. 일단 배고프니까 뭐라도 먹자.”

“됐어. 밥 맛 떨어져. 갈래.”

그녀는 외투도 벗지 않은채 앉았다가, 가방만 챙겨들고 휙하고 나가버렸다. 나는 분식집 한 켠에 쪼그리고 앉아 아주머니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 죄송합니다 하고 나가야하나? 어차피 그녀를 따라가서 붙잡을 생각도 아니었기에 곧바로 그 생각은 머리에서 지워졌다. 공허한 머리와 뱃속은 에너지를 원한다. 비난을 받은 자리에 꿋꿋하게 앉아 김밥과 라면을 시키고 꾸역꾸역 먹었다.

돌아온 자취방은 싸늘하다. 보일러는 돌아가는지 마는지… 그녀가 빙의된 것 같은 보일러는 씻는동안 뜨거운 물과 찬물이 번갈아 나온다.  괜히 화가난다. 보일러 온도를 맞추다 지쳐 그냥 미지근한 물로 씻고 만다. 아이 씨.. 그녀의 욕을 하면서 샤워를 마쳤다. 그 사이에 도착한 핸드폰 메시지가 떠 있다.

– 나 잡지도 않더라?

– 어차피 뿌리치고 갈거잖아.

– 어차피 배고플거 밥은 잘 먹던데? 나참 기가 막혀….

보고 있었나…? 갑자기 낯 뜨거워졌다. 뭐라고 말해야하지…? 그동안의 내 연애에 대한 노력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없는데 난 왜 무신경한 사람으로 몰리고 있는걸까?

– 야.. 답 없다. 너 정말. 나 오늘도 네 지겨운 얘기 참느라 엄청 노력했는데. 넌 어쩜 그렇게 배려가 없니?

– …….

입에 테이프가 발라진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속에서는 하고 싶은 말이 어마어마하게 맴도는데 어떻게 꺼내야할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거지? 내일 출근해야하고 피곤한데 그냥 넘어갈 수 없는걸까? 진부한 싸움이 계속된다. 누군가 양보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다.

– 됐고… 나도 너처럼 배려없는놈 만나느라 시간쓰고 참 한심한데… 그냥 경험이라고 치고…. 메신저로 이런 얘기 하기 싫은데 얼굴보면 또 화날거 같아.

– 야.

– 차단할게. 연락하지마. 빡치니까….

– 그게 아니잖아. 잠깐만. 전화 받을 수 있어?

메시지에서 없어지지 않는 숫자 1. 꺼져있는 전화기. 폭발할 것 같은 분노에 괜히 베개를 때린다. 네가 알아주지 않은 내 연애는 노력이었다고.. 그 얘기 너에게 해주려고 일주일 전부터 읽은 소설이었어. SF소설 좋아했잖아. 중국어 공부 하고 싶대서 같이 다니다가 그만둔 학원 교재, 그것도 저기 저렇게 쌓여 있잖아. 예전에 갖고 싶은 가방 사주려고 일한거. 너에게는 그냥 선물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그게 석 달동안의 내 시간이었다고….

오래된 보일러가 덜컥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제 고장나도 이상하지 않을 보일러는 참 열심히도 가동되고 있지만, 방은 미지근하기만 하다. 아마도, 다시 뜨거워 질일은 없을 것이다….

– 끝. @A-RA.COM –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