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스 (Argos)

2009년 12월 6일   |   by 아라

퇴근시간 전에 아슬아슬하게 회의가 끝났다.
자리로 돌아와 퇴근 준비를 하려고 보니, 책상 위에 낯익은 쿠키 봉지가 놓여있는 게 보였다.
주변 동료들의 책상위에도 똑같은 과자가 놓여있는 걸 보니, 그녀가 다녀간 게 틀림없었다.
모두들 그들이 헤어진 것을 알고 있는데도 계속되는 그녀의 호의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배려에 그 주인공의 심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겠지.

” 누가 준거예요, 이거? “

상황을 알리 없는 신입이 멋모르고 묻자, A의 표정이 굳어졌다.
못 들은 척 가방만 열심히 챙기고 있는 A.

” 산타 클로스라고 해두지. “

나는 신입에게 더 이상 궁금해하지 말라는 의미로, 손가락으로 쉿 표시를 하고
가방을 챙겨든 A의 등을 떠밀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조용한 퇴근을 위해 곧 시끄러워질 사무실앞의 복도를 지나
일부러 조금 떨어져 있는 비상용 엘리베이터로 발길을 옮겼다.

1… 2… 3… 엘리베이터가 14층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A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발끝만 바라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숙인채 말한다.

” 그런 기분 알아요? 세상끝으로 간다고 해도 나를 찾아낼 것 같은… “
” 헤어진거 아니었어? “
” 벌써 2년전에 헤어졌죠….. “
” 자네가 다른 사람을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
” 그것도 해봤어요. “

그는 텅빈 눈을 들어 복도옆 창문으로 희미하게 날리는 눈발을 바라본다.
사랑이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그가 사랑을 힘들어 하는 것일까?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어느날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서 그러더군요.
  도대체 너는 목숨이 몇 개냐구요. “
” 무슨 말이야? “
” 최근 헤어진 여자친구를 좋아했어요. 너를 목숨보다 아낀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목숨이 몇 개길래, 다른 여자에게도 줄 목숨이 있냐는 거죠.
  그걸 어떻게 그녀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텅 빈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만 타고 문이 닫힌다.

” B씨. 아르고스 아세요? “
” 아르고스? “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요. 뒷통수에, 정수리에 눈이 달렸다고 하기도 하고,
  전신에 눈이 달렸다고 하기도 하고, 눈이 백개나 달렸다고 하기도 하죠.
  어느 것이 정설인지 알수 없지만, 특정 대상을 감시한다면 그 대상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시의 눈을 가졌다는 말일거예요. “

9… 8… 7… 정적이 흐른다. A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 그렇다면 자네에겐 그를 잠재울 헤르메스의 피리가 필요한걸까? “

침묵을 깨고 내가 한 마디 하자, 그는 도리질을 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 이상하죠? 이렇게 나를 감시하는 그녀의 행동이 몹시 싫으면서도,
  한 없이 사랑스럽거든요. 내 안의 나는 그녀를 증오하고 있고,
  또 하나의 나는 미칠듯이 그녀를 사랑해서 역으로 스토킹하고 있지요.
  또한… “

갑자기 위협적인 표정으로 내 가까이로 불쑥 들이 밀고는

” 남들에게 베푸는 호의조차 못 견디게 질투나구요.
  B씨의 가방안에 있는 쿠키 같은거요. “

돌변한 A의 태도에 오싹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중,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그는 다시 다정한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 헤르메스의 피리는 제가 아니라 그녀에게 필요할 겁니다.
  여기 들렀던 그녀가 쿠키만 전해주고 어떤 놈의 차를 타고 가더군요.
  GPS 추적중이거든요. 내일 뵐게요. “

– 생각하던대로 써지지 않았네요. (….) 내공이 부족한 듯 @A-RA.COM –

Recent Comments

  1. 기호군

    응답
    2009년 12월 17일 @ 10:43 오전

    글이라는 것은 언제나 손가락을 거치면 생각과 다른 것이 됩니다.
    그들은 손가락을 이용할 틈만 노리는 별개의 생물체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요.

    • 아라

      응답
      2009년 12월 17일 @ 1:43 오후

      별개의 생물체이지만, 저에게는 왠지 쪼렙만 붙는군요. (….)
      언제쯤 굉장한 생명체가 저를 이용해 줄지…

      추신 : 블로그 재개장 축하드립니다. 어쩐지 티스토리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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