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기억들.
일상을 깨우는 기억들.

아침을 먹고 편지함을 바닥에 쏟아부었다.
하루 하루 내 신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피부비늘처럼
기억에도 희미한 순간들의 비늘들.
그것들이 나의 감성을 깨우고 있다.

나만이 부를 수 있던 이름.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비었던 시간.
손을 잡고 걷던 거리들.
결별의 편지.

[운]이라는 친구는
과거의 어느 순간 내 앞에서 사라져 버렸고
지금 그녀는 내 방바닥에 엎드린채
우리 즐거웠던 시간을 노래하고 있다.

숱한 기억들.
기억의 일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면서
내 감성도 함께 던져진다.

닫혀진 내 마음 밖을 서성이며 노크하던 사람들의 편지들.
그리고, 닫혀진 그의 마음밖에서 서성이다 결국
심리적인 진퇴양난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부치지 못한 나의 편지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너무나 쓸쓸하고 쓰라린 것.

– bombi76@hitel.net –

면회

숨쉬기조차 의미없는 시간들.
백수에게 일용할 양식처럼 주어지는 free time 24시간.
절망이라는 것은
희망을 가졌을때만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다.
진공.
무감각.

월요일부터 전화가 왔었다.
그런데 목요일이 되어서야 겨우 통화를 했고,
토요일에 면회를 가겠다고 약속했다.

땀냄새로 범벅이된 위병소.
거기서 모델같이 화장을 한 소녀를 만났다.
뒷집 순이같은 나와,
잡지에서 튀어나온듯한 소녀의 대조적인 차림새..

3시간 동안 별말없이 딸기우유를 마시면서
얼굴만 멀뚱히 바라보다가 나왔다.

누가 누구를 면회간건지.
누가 누구를 위로한건지.
도대체가 분간이 가지 않는 토요일 오후 3시.

누가 내 마음속으로 면회와서 위로 좀 해줘요.

– bombi76@hitel.net –

갑작스러운 것들

전화를 하다가도, 방금 뭐라고 했지?하고 되물을 때가 많다.
요즘 생활은 마치 진공상태인 듯 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오늘 신문이 3개가 들어왔다는 것.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

하이텔에 접속을 하고서 몇 시간째 계속 글을 남길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온라인에서 오래오래 고민하며 조울증에 걸린 내 자신에 충실할 수 있으면서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나타내지 않을 수 있는 곳.

늘 이 곳에서 접속을 끊었던 대로 습관처럼 sg790 1을 눌렀다,
만족스럽다. 여기는 나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글도 곧 묻혀버릴테니 걱정 안해도 되겠지.

오늘은, 비가오고 몹시 어두운 아침으로 일과가 시작되었다.
평소같지 않게 여기저기 둘러도 보았다.
변화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갑작스런 게시물 하나에 난 더욱 멍해져 버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들에게 말하기 싫어하는 내 존재.
내 이야기를 숨기는 너의 글들.
그리고 옛날 이야기속의 그녀의 이름
아직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나는 너에게 뭐였을까?

– bombi76@hitel.net –

충격적인 결혼기사

우리집은 아직도 신문을 구독하지 않는다.
이사온지도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아빠가 뭘 구독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전에 살던 사람이 지방신문인 [국제신문]을 구독하다가
끊지않고 가버리는 덕분에 우리집은 어쩔수 없이
국제신문을 짜증을 내며 보고 있다.

오늘도 신문이 현관앞에 떨어져 있길래
주워와서 정치면부터 차례로 읽어 가던중에
마지막 면에서 아주 충격적인 기사를 읽었다.

박진영 결혼 전격발표!

너무 놀라서 신문을 떨어뜨렸다.
딱히 팬은 아니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노래를 많이 불렀던 가수였는데….
18일 노보텔 앰배셔더 호텔.
뜬금없이 [졸업]의 한 장면처럼 신랑입장을 하는 박진영의 손을 잡고
도주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다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상상이네…

– bombi76@hitel.net –

누구를 알아가기

이와이 슌지 감독의 첫사랑 VCD가 오늘 도착했다.

보내는 사람이 여자이름인데, 녀석은 대체 누구에게 부탁 한걸까?
아무튼 아주 바보스러운 사람인건 분명하다.
우리집은 1103호이고, 녀석의 집은 1108호인데
부탁받은 사람이 녀석의 집주소를 적어 놓았다.
진짜 바보같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우체부 아저씨다.
몇 달전부터 법원에서 온 등기우편물때문에
수령하러 내려가면 평범하지 않은 내 이름에 반응하며
가끔 아는척을 하더니 이번엔 소포에다가 뭘 적어놨다.
1108이라는 숫자에다가 동그라미를 치고,

“바르게 적어 주세요!! -체부- “

너무 웃겨서 한참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아저씨가 내 이름을 기억해서 소포가 제대로 오긴왔다.
평소에 등기우편  수령하란 연락이 오면 귀찮아 죽을것 같았던 일도
모두 기특하게 여겨질 지경이다.
그래도 소포 보낸 사람은 정말 바보다.

– bombi76@hitel.net –

청첩장을 받다

고등학교때 시(市)에서 운영하는 독서토론써클에서
서기로 잠시 몸을 담았던 경험이 있다.
나는 가장 활동이 부진한 5기였고
발표회때 만난 진희는 7기였다.

그런 진희를 1년만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할 얘기가 있다며 조심조심 웃던 그 애가
3월에 결혼을 한다는 게 아닌가.

상대는 중학교 때의 선생님.
지난 몇 년동안 선생님을 사랑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 사랑을 쟁취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않았다.

“선배, 올거죠? 나중에 집에두 자주 놀러오세요. 꼭이요!”

부럽다. 그녀의 모든 확신들이.
사랑에 대해 얻은 답들이.
사랑을 알아낸 그대가 부럽다.
나는 뭘 했을까?

– bombi76@hitel.net –

C:\> FORMAT 1997:

생각해보니 1997년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나같은 컴맹이 처음 PC통신을 한 해이기도 하고
첫 남자친구에게 버려진 해이기도 하면서
또 동시에, 나마저 나를 버릴뻔 했던
아슬아슬한 해이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1997년은 기억해야 할 일들보다
잊어버려야 할 일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어제는 늦도록 잠을 설치며 내 주변을 정리했다.
정리를 해도 해도 머리가 아픈 것이
뭔가가 끈질기게 내 머리끝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을 포맷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안녕. 1997.

– bombi76@hitel.net –

허쉬초콜렛 같았던 그 애

첫 맛이 진하고, 끝 맛이 쓴 허쉬초콜렛.

소년이 있었다.
나에겐 그저 동경이었던 소년.
내게 한 번 말을 건넨 적도
눈길을 준 적도 없는 소년.

갈색 머리카락을 부서지듯 날리면서
계단을 달려 내려오던 그 소년이
바람을 일으키며 내 곁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설레어 죽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 다리를 다쳐
몹시 절며 귀가하던 소년의 뒤를 밟아
그의 뒷모습이 사라진 집을
가만히 올려다 본 기억이 있다.

누군가의 애정어린 손길로
지붕까지 얌전하게 틀어올린 담쟁이가 있는 베란다.
말소리가 들려 올 것 같은 따뜻한 불빛이 비치는 창가.
마치 동네에서 그 집만 달랑 오려낸 듯
딴 세상같은 느낌을 주는 집이었다.

소년이 보고싶어 몸살을 앓았던 겨울.
교복 주머니에 허쉬초콜렛을 넣고
그 집앞을 지키고 서서 무작정 그 애를 기다렸다.
철 없는 열일곱 –
전해줄 용기도 없었으면서.

두 시간을 그렇게 추위에 떨다가
소년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그 날
마음처럼 감기몸살에 시달려 며칠을 끙끙 앓았다.
몸도 마음도 너무 추웠던 겨울이었다.

그리고,
그냥 바라보기에도 아까웠던 그 소년은
내가 어떤 인연을 기대하기가 무섭게
이사를 가 버렸다.

나는 아직도 그 애의 모습을 기억한다.
도무지 사랑이라 말하기엔 너무나 투명한 기억.
요즘도 가끔 그 애가 생각 나곤 한다.

한 번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던.
너무나 쓰게 이사를 가버렸던.
허쉬초콜렛 같았던 그 애 –

– ara@ara.p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