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 (Full Moon)

무심한 바람결에 잠이 깬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펄럭거리는 얇은 쉬폰 커튼 사이로 보름달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언제나처럼 그녀가 잠들어 있다. 신경이 예민한 그녀는 내가 일어나는 반동에 얕게 잠이 깬듯 몸을 조금 꿈틀거리다가 다시 잠들었다.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옛날 일이 떠올랐다. 시궁창같던 내 인생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낳았었다. 그건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우리를 양육하기 위해서 밤마다 어딘가로 사라졌다. 애초부터 완전하지 않았던 편모 가정의 우리는 늘 가난에 허덕였고, 근근히 버티던 우리 가정은 큰 형이 교통사고로 죽던 날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았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그 후, 하루 먹고 살기도 버거웠던 우리들의 삶은 생존 자체가 목표였다. 사회가 무서웠고, 삶이 두려웠던 어린 날의 나는 모두를 적으로 보았다. 가까이 다가오면 죽여버릴 기세로 달려들곤 했던 분노가 가득했던 나. 그렇게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거리를 배회하던 나를 따뜻하게 대하던 유일한 존재가 그녀였다.

그녀가 몸을 뒤척인다. 창밖의 달빛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이 여신처럼 빛나는 것 같다. 나의 경제적 무능함도 사랑했던 그녀. 함께 사는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을 하던 그녀. 직장에 나가 있는 동안 내가 떠날 것이 두려워서 현관문을 꽁꽁 잠근채로 외출하던 그녀. 평화롭게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그녀의 곁을 떠나는 것이 그녀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불고, 커튼이 다시 펄럭인다. 갑자기 창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조심스레 창틀위로 올라가 오랜만의 새벽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도시의 불빛들과 교회 십자가, 깜빡깜빡 점멸하는 교차로의 신호등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때 갑작스레 내 어깨를 감싸는 다정한 손.

” 그러지마. 나가면 안돼… “

그녀는 잠에 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커튼을 당기자, 보름달이 순식간에 감춰진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졸음이 가득하다. 그녀는 나의 볼에 볼을 맞대고 부비다가, 내 머리를 품에 감싸고 누웠다. 갑자기 한순간의 이상하고 불안했던 생각이 달아나고 새삼스레 그녀의 품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맞아. 이 행복이 끝나지 않겠지. 내 말을 알아들을리는 없겠지만.

” 냐옹. “

– 여름밤이 시작되다. @A-RA.COM –

도시 동화

공원에 보이는 사람은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기 엄마 몇몇, 햇볕을 쪼이는 노인들. 학교를 땡땡이 친듯한 젊은 커플. 그리고, 이 풍경에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소녀 한 명. 아기 엄마들과 노인들은 무엇인지 끝없이 수다를 떨고 있고, 저쪽 벤치에 앉아 있던 젊은 커플은 실랑이를 하더니만 아가씨가 좀 토라진 모습으로 돌아 앉는다. 그와중에 소녀는 공원에서 혼자 꽃을 팔고 있었다.

한적한 평일의 공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때문에 소녀는 정오가 다되도록 한 송이도 팔지 못했다. 하지만 별로 그런것을 개의치 않는지 소녀는 간간히 고개를 들어 바람을 느끼거나,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때, 젊은 커플의 청년이 소녀에게와서 말을 걸었다.

” 장미 얼마예요? “
” 어느 장미의 가격이 궁금하신가요? “

청년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거라는 말로 장미를 가르켰다.

” 노란 장미는 천원이예요. “
” 아니요. 분홍색이요. “
” 그건 이천원이예요. “

청년은 분홍 장미를 달라고 말했다.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행동을 보니 소녀가 눈이 먼것 같기도 하다. 소녀가 더듬더듬 장미를 꺼내어 청년에게 건내는데, 혼자 벤치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일어나서 가버린다. 소녀의 굼뜬 행동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청년은 무심코 벤치를 바라보았다가 아가씨가 일어나서 가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청년은 그녀를 잡기 위해 뛰어간다.

” 저기요! 돈은요? “

청년은 소녀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지 장미를 든채 그대로 뛰어가 버렸다. 소녀는 쫓아가지 않는다. 아니 못 쫓는 것이겠지만. 소녀는 멍한 눈을 들어 청년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꽃바구니를 정리했다.

해가 조금 기울었다. 나는 책을 덮고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해질녘이 가까워 오는 시간. 예상했던대로 그녀는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자신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자리를 정리하며 채비를 하다가, 다시 꽃 파는 소녀를 바라본다. 소녀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직도 이천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소녀가 조금 안타까웠다. 저 소녀도 이제 집에 보내줘야 할 것 같다.

” 아까는 미안했어요. “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 좀전에 장미요. 여자친구가 일어나서 가버리는 바람에 붙잡느라고… “
” 아아… 아까 장미 사가신 분이군요! 그러셨구나.. 괜찮아요. “

역시 그녀는 눈이 멀었다.

” 어머니 드릴 장미도 한다발 묶어주시겠어요? 아까 못 드린 돈하고 같이 드릴게요. “
” 어머 그럼요. 무슨 색으로 드릴까요? “
” 똑같은걸로. “
”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열심히 더듬거리며 포장을 하는 소녀를 본다. 당신이라도 마음의 상처를 하나 지우고, 편안한 마음이 된다면 내 말이 거짓이어도 용서 받을 수 있겠지.

” 하루 종일 기다려도 손님이 오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사실은 아까 저에게 말을 건내 주신 것만으로도 기뻤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꽃까지 사주시니까 뭐라 말할 수 없이 고마워요. “
” 하루 종일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쉽지는 않죠.”

소녀의 꽃 포장이 거의 끝나간다.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띈채로.

”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기다림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바람도, 새 소리도, 청명한 공기까지 모두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저는 그냥 그 순간안에 있는거니까요. “
” 같이 기다려줘서 고마웠어요. 사실 전 오늘 엄청 지겨웠답니다. “
” 무슨… 말씀이예요? “
” 꽃도 그렇고. 지금 이 이야기들도. 아무튼 고마워요. “

소녀에게 돈을 쥐어주고 돌아섰다. 눈 먼 소녀는 나와 청년을 구분하지 못했지만, 그것도 괜찮은 것 같다. 그림자가 점점 길어진다. 하루가 끝나가고 마음도 가라 앉는 것 같다. 뚜벅 뚜벅 공원을 걸어나가듯이 그녀에 대한 마음도 조금씩 빠져나가는 어느 봄날.

– 제목만 써놓고 두 달. 완성까지 길었지만 마음에는 안 드는군. @A-RA.COM –

셋업 맨 (Setup Man)

홈팀 선발투수인 김불운 선수는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8회 1실점으로 3:3 동점을 허용한 후 얼마간 페이스를 찾지 못했다.
더구나 사인이 맞지 않아 수비 실책으로 추가 1실점을 하고 만다.
위험하게 만루 상황까지 갔다가 8회를 힘겹게 정리했다.

오늘은 그만 던지자는 감독님의 만류에 자존심이 상해
조금 더 던져보겠다고 고집을 부려 9회에도 마운드에 오른다.
이제 마지막 이닝이다. 타자들이 잘 해주면 팀은 승리 할 수 있다.
불안한 마음을 잘 추스려, 첫 주자는 삼진으로 잡는다.

두 번째 타석에는 박또철 선수.
김불운 선수와 같은 해에 데뷔해 함께 신인왕 경쟁을 하던 타자.
김불운 선수는 도중에 부상을 한 번 겪었지만, 박또철 선수는 승승장구중이었다.
김불운 선수를 두세 명 줘도 살 수 있을까 말까 한 비싼 원정팀의 간판 타자.
최근에는 메이저리그에서 스카웃 제의가 온다는 기사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박또철 선수를 바라보는 김불운 선수의 눈빛이 흔들린다.
폭투. 공은 김불운 선수의 손을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치솟는다.
박또철 선수는 1루로 달려가고, 포수는 공을 잡느라 바쁘다.
주루코치의 무리한 지시로 2루를 향하던 박또철 선수는
곧이어 공을 수습한 홈팀에게  아슬아슬하게 아웃당한다.

홈팀 감독이 마운드에 오른다. 컨디션 난조에 폭투까지… 할 말이 없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는 더 이상 제구가 안되는 자신은 마운드를 내려가야한다.
김불운 선수가 내려간 마운드에 오른 구원투수 나행운.
상대 타자를 깔끔한 삼진으로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온다.
9회초가 끝났다.

드라마는 지금부터다. 9회말 홈팀의 타선이 폭발한다.
결국 홈팀은 7:4의 점차를 벌리며 승리를 챙긴다.
승리투수는 나행운.

” 인생에서 운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일까? “

전날의 경기를 보지 못해 스포츠 신문 기사로 경기 결과를 읽던 그가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라고 무신경하게 되묻자
그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던 어제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혀 흥미가 없던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그가 추가 설명을 한다.

” 9회까지 팔이 빠지도록 던졌는데, 순간의 컨디션 조절 실패와
  수비 실책으로 승리가 날아가버린 선발투수의 마음은 짐작이 되는데
  단지 0.1이닝을 투구하고 승리를 챙긴 구원 투수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어.
  미안함이 있을까? 당연하다는 마음일까? 전혀 짐작이 안되네. “

결과적으로 팀은 승리했지만 그 날 9회까지 공을 던진 선발투수는
승도 패도 얻지 못했고, 9회에 잠깐 투입된 셋업맨이 승을 챙겼다는 것이다.
선발투수에게 각별한 애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을 그가 지금
선수들의 심리 상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책을 한 번 털어낸다. 지금 그게 무슨 대수람.
책을 정돈해서 상자안에 차곡차곡 넣으며 그에게 대꾸했다.

” 그게 운하고 무슨 상관이야? “
” 신의 계략같아. “

그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내뱉는다.

” 45개중에 6개의 숫자를 맞출 확률이 지극히 낮음에도
  그 엄청난 확률을 뚫고 로또를 맞는 사람들을 봐.
  그런데 적어도 내 주변에는 없다는 얘기지.
  뭔가 계략이 있다는 생각 안들어?
  신이 인간을 만들고 삶의 길이를 결정하고 설계할 때
  무작위의 행운을 어느 정도 포함시켰을까 안 궁금하니? “
” 그건 오버 아냐? 과대망상도 병이라더라. “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는 신문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책상위에 쌓여있던 서류더미를 쓰레기통에 쏟아넣는다.
이내 꽉찬 쓰레기통에는 더 이상의 종이 뭉치들이 들어갈 틈이 없다.
서류더미는 내일이면 낡아버릴 스포츠 신문보다 더 하찮은 것처럼
쓰레기통에 박혀 아무렇게나 구겨지고 널부러져 있다.

” 게임이 끝난후의 이런 문서 나부랭이들이 무슨 의미람.
  회사라는 작은 왕국에서 나도 살아 남고, 프로젝트도 살아 남는 확률에
  컨디션 난조와 수비 실책의 시간이 찾아와도 프로젝트는 성공하기도 하지.
  다만 나는 분명 엔트리엔 있었는데… 승도 패도 챙기지 못한 김불운일지도 몰라. “

책 상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짐을 챙기다말고 신문을 보다가, 딴짓을 하다가,
이젠 아예 아무런 의욕도 없이 늘어진채 멍하니 앉아있는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뭔 책을 이렇게 많이도 가져다뒀담. 하고 혼잣말을 하다가
박스 테이프 뜯어내서 상자의 윗면을 봉했다.

” 형. 그거 알아? 관점에 따라서는 9회의 마지막 타자를 처리하는
  중간계투의 0.1이닝이 결코 편하진 않다는거. “
” 그 정도면 완전 편하게 승을 챙긴거지! “
” 형 말대로 운의 균형을 맞추는 절대자가 있다면,
  컨디션 난조를 극복하는 순간의 무게와 9회 0.1이닝의 부담의 무게를
  똑같이 계산했을 것 같아. 그래도 불공평한가? “
” 응. “
” 그럼 시간의 축을 길게 늘인 신의 계산으로 보고….
  오늘 불운의 무게와 같은 좋은 것이 있을 거라 믿자. “

그는 나의 말에 더 이상 대답 하지 않았다.
수년만에 백수가 된 우리 두 사람은 더 이상 프로젝트 얘기는 하지 않기로 한 지
72시간만에 전혀 상관없는 소재로 프로젝트를 입에 올리고 말았다.
휴일의 회사, 고요한 적막, 수 많은 짐 상자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직원이 아닌 그와 내가 있는 것이 기묘하게 어울리지 않는다.
엔트리에는 있었지만, 승도 패도 챙기지 못한 9이닝을 던진 두 사람의 주말이었다.

– 힘내요. 김불운 선수. 같은 무게의 행운이 인생 어디쯤에 있을거예요. @A-RA.COM –

Twenty-two

그녀는 아직도 탁자에 엎드린채 울고있다.
울음때문에 들썩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일부러 발을 까딱거려 바닥의 자갈 소리를 내보았다.

그녀와 내가 앉아 있는 탁자옆으로 기차 선로가 지나고 있다.
찻집을 기차역처럼 꾸밀 생각을 하다니, 가게 주인의 안목이 새삼 훌륭하게 느껴진다.
여기 놓여있는 테이블과 찻잔들과 주변 손님들을 제외한다면 이 곳이 찻집이라는 것을
금방 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실내장식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몹시 기분좋고 아늑한 공간이었을 것이 분명한 곳.

– 저기 미안한데… 그만 그치고, 내 말 좀 들어봐.

한참 울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제야 조금씩 울음을 그치기 시작한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는다.
빨갛고 통통한 볼에 눈물자국이 가득하다.
눈물에 젖어 있어도, 그 눈이 참 크고 예쁘구나.
짧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다.

– 사실 나는 네가 왜 미안해 하는지 모르겠어…
  난 아무렇지도 않거든. 조금 전의 말은 안들은 걸로 하면 안될까?

그녀가 갑자기 딸꾹질을 시작했다. 답답한 모양이었다.
가슴을 두 번 탁탁 치고는,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 제대로 안 들었나본데 내 말은… 처음부터 너랑 친구할 생각 없었다는 얘기야. (딸꾹)
  너랑 친한 현민이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너에게 말을 건거야.
– 그게 나빠?
– 너는….(딸꾹).. 이해가 안되는거니? 말귀가 어두운거니?
– 난 오히려 네가 그 말을 늦게한게 나쁜거 같은데.
  빨리 말했으면 녀석이 군대가기전에 네 마음을 알았을거잖아.

정신이 반쯤 빠져나간 것처럼 나를 멍하니 보는 그녀.
처음보는 눈물 자국, 지워진 화장, 간간히 딸꾹질을 하는 모습이 낯설다.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들이키는 그녀.

– 내가 미안한건 널 이용해서가 아니야. (딸꾹)
– 그럼?
– 나 이제 너랑 같이 안 다니려고 다 털어 놓은거야.
–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게 그냥 학교서 붙어다니지 못하는거 그거?

다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서인지, 나와의 대화가 괴로워서인지 잘 모르겠다.
눈화장이 얼룩진 그녀의 눈이 좀 부은것도 같다.

– 분위기 파악 정말 못하는구나. 애들이 너 싫어하는건 아니? (딸꾹)
  네가 미움받는 이유는 수십가지도 더 댈 수 있어.
– 납득은 안되지만, 나를 싫어하는 건 나도 알고 있어.
– 넌 정말이지.. 알 수가 없구나. 여태 얘기한 건 절교하자는거야. 이렇게 말해줘야겠니?
– 그러니까… 나 괜찮으니까 안하겠다고.

우리의 대화는 한 시간 넘게 계속되었지만 서로의 입장이 팽팽하게
조금도 좁혀지지 않고 탁자옆 철도 선로처럼 평행을 긋고 있었다.
참다못한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손을 휘휘 내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만다.
의자에 밀리는 거친 자갈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긁는다.

– 불러낸거 빚지기 싫으니까. 이건 내가 계산할게.

흥분해서 떨리는 손으로 계산서를 집어들다가 한 번 떨군다.
다시 계산서를 집어든 그녀는 황망히 출입구쪽으로 나갔다.
뒤돌아서는 그녀의 원피스 자락이 일으키고 간 바람이 코끝에 와 닿았다.
교양시간은 원래 땡땡이 치는거라며 만화방에 끌고가던 그녀에게서 나던 향기.
H.O.T 짱이지 않냐, 난 장우혁이랑 결혼할거야 하면서
사진에 키스를 마구 퍼붓던 그녀에게서 나던 그 익숙한 냄새.

그녀가 가게를 나간 후에, 그리고 얼마를 더 지나 코끝에 남아 있던
그녀의 향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우리의 관계가 박살난 것을 깨달았다.
멍한 표정으로 그녀가 엎드렸던 탁자에 엎드려본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 – –

혼자 점심을 먹고, 하교를 하는 일도 제법 괜찮다.
혼자라는 것에 익숙해져보면 생각보다 크게 외롭지 않은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혼자있는 사람을 불편해 한다.
혼자는 괴롭지도 않다. 하지만 함께 있어야 하는 말 없는 공간은 숨막히다.

그 후로 그녀는 정말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같이 작업대를 쓰기 싫어하는 아이들 덕분에 항상 넓은 책상을 쓰는 것은 좋았지만
복도 건너 앞자리에 그녀의 뒷모습은 가시처럼 찔렸다.
왠일로 그녀의 새로운 단짝이 늦는지 오지 않자 그녀는 초조한 듯하다.
나를 의식해서인지 계속해서 시계를 본다.
스토커처럼 한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녀의 자리로 걸어갔다.

– 옆에 좀 앉아도 돼?
– …..
– 얘기 좀 할래?
– …..
– 못 들은 척 하지 말고.
– ….

바람을 대하듯 그냥 그렇게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처럼
그녀는 미동도 없다. 화도 내지 않는다.
짜증이 나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조금의 저항도 없는 그녀.

– 거기 내 자린데?

그녀의 손목을 꽉 쥐고 있는 내 옆에 어느샌가 그녀의 새 단짝이 나타났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만 일어나라는 표정이었다.

– 얘기 좀 하고.
– 아, 곧 수업 시작하는데 나중에 하든지!

그녀 단짝은 새빨갛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씰룩거리며 큰소리로 불만을 토한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부딪칠새라 뒤로 움찔 물러나는 그녀의 단짝은
돌아서서 가는 내가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 아.. 씨 뭐야. 버스 놓친 것도 짜증나는데 재수없게 저 년이 내 자리에 앉았어.

휴지로 책상과 의자를 열심히 닦아댄다. 웃기시네.
애당초 성년식부터 대학생활은 완전 뒤틀려버렸으니 상관없다.
동기의 연애편지를 대신 전해줬을 뿐인데, 어느날부터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동안 그 시선들을 견뎌준 그녀까지도 완전히 나에게서 멀어져버렸다.

혼자는 외롭지 않다. 불편하지도 않다.
너희들이 불편하게 나를 바라보는 공간에 있는 것이 불편할 뿐이야.

– – –

우체국 계단에 앉아서 햇볕을 쪼인다. 몹시 덥다. 하지만, 이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온 교정에 가득한 벚나무들의 푸르름, 분수대, 찬송가 소리가 들리던 채플실.
별로 추억할 것은 없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주섬주섬 시야에 담는다.

– 학생. 학과장님 오셨는데?
– 아, 예예…

우체국 계단의 살인적인 햇볕이 학과장실로 이어져 있다.
복도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볕을 피해서 걷는다.
온도차가 있어서인지 복도를 걷는 중간중간 현기증이 났다.
걷고 있는 동안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붕뜬 기분이다.
학과장실 문을 들어갔다 나오면 난 어떤 인생으로 살게 될까?
조용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햇볕에 데워진 공기가 열린 문으로 쏟아져나와 숨막히도록 뜨겁게 맞이해준다.

– 자퇴원 도장 찍어달라며?

학과장은 이제 막 외출에서 돌아와 에어컨을 작동시키며 말했다.

– 예.
– 왜 자퇴하려고?
– 나중에 다니려고요.
– 그럼 그냥 휴학해.

불편한 왼쪽 다리때문에 약간 절룩거리며 정수기앞으로 다가간 학과장은
일회용 커피를 두 잔 타서, 한 잔을 나에게 건넸다.
그럴 줄 알고 대답할 말도 준비해뒀지. 선생.

– 서무과에서 등록금 납부기간이 지나서 등록금 납부전엔 휴학이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 등록금 내면 되겠네.
– 돈 벌어야 해요.

꾸벅 인사를 하고 커피를 받으며 학과장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흐음..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턱을 만지는 그.

– 자네, 담당교수랑 상담은 했나?
– 예. 도장도 받아왔습니다.

학과장은 주섬주섬 책상으로 다시 걸어갔다.
그리고는 아주 느릿느릿하게 서랍에 열쇠를 꽂고 돌리고는 도장을 꺼냈다.

– 뭐 도장 찍어주는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 하지만….

인주가 어딨더라 하면서 한참동안 찾기까지… 저 영감 정말 굼뜨네.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으니 슬슬 짜증이 났다.
그는 도장을 인주에 꾸욱 누른후, 뒤집어서 위아래 구분을 살펴본 다음 말을 이었다.

– 공부는 때가 있는 법이야. 그걸 놓치면 끝이지.
  모든건 다 거기에 맞는 시간이 있으니까 잘 생각해. 나중에 후회말고.
  자… 이제 된거 같군.

그는 자퇴원에 도장을 찍어주고 이제 그만 가도 좋다고 손짓을 했다.
놓치면 끝이라…. 이 곳의 시간들은 이제 놓치지 않을 수도, 놓을 수도 없다.

– 학과장님.
– 뭐 더 할 말이 남았나?
– 복적 확인서 한 장만 써주십시요.
– 복적 확인서? 듣도 보도 못한 그건 뭐냐?

도장에 묻은 인주를 휴지로 닦아내던 학과장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른침이 넘어간다.

– 나중에 학교에 복적할 수 있도록 확인서 써주시면 안될까요?
– 허허허허… 재밌는 친구일세.
  자네가 그런거 써달라하지 않아도 언제든 원하면 복적할 수 있어.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되네.

껄껄 웃는 학과장 뒤 유리창 밖으로 벚나무 이파리가 흔들린다.
더운 미풍이 교정을 훑고 지나갔다. 아까 복도에서 느꼈던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자퇴서를 교무과에 내는 순간 그녀와의 연결고리는 모두 사라진다.

– 나중에 복적이 안되면 어쩌나요?
– 그럴 일 없네. 교칙이 그러한데….
– 그럼 확실한건데, 안 해주시려는 이유도 없잖아요.

나는 점점 떼를 쓰고 있었다.
학과장은 처음에 어처구니 없어하다가 나중에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그냥 여기에다가요. 이렇게… 제목 쓰고…
  제 학번 밑에 복적이 가능함을 확인한다고 한 줄만 써주시고
  도장 찍고, 오늘 날짜만 박아주세요. 예?

연습장에 학번을 갈겨쓰고 학과장에게 내밀었다.
그는 연습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골 때리는 친구구만…

딱히 해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기에 반박할 수가 없던 그는
예의 그 느린 움직임으로 일어나서 사물함을 열고 깨끗한 A4 종이를 한 장 꺼내왔다.

– 자네가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게 위안이 된다면 써주지.
  그래도 최소한 제대로 된 종이에다가 써야지.

나는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냈다.
학과장은 도장에 다시 인주를 묻히고 확인서에 도장을 찍어준다.
그리고 확인서를 건내주며 이제는 진짜 용무가 없는거지?하고 도리어 내게 확인한다.
그럼요.하고 더 이상 여대생이 아닌 내가 여대생처럼 발랄하게 미소 지으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이제는 진짜로 학생도, 휴학생도 아닌거로구나.
재미없던 학교는 PC통신과 글쓰기를 가르쳐주었었다.
심심했던 학교생활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조금 서운하다.

복적 확인서를 가슴에 대본다.
오롯하게 나에게 남은 지금까지의 좋았던 시간에 대한 흔적.
학교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지만, 지금까지의 시간을 이렇게 갖기로 한다.
가끔 이 순간을 생각할거야. 고마웠어. 22.

– 짧은 대학 시절이 좀 괴로웠던 이유들이 생각나는 요즘. @A-RA.COM –

6월 13일

친구에게.

갑작스런 메일에 놀라지는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그동안 연락을 하지 않아서 이 메일이 몹시 어색하다는 것을 알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나니 당신이 생각났어요.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도
좋은 기억 한두 개쯤 더 만들 시간은 허락되겠지요.
좀 우울한 이야기죠? 그래도 이건 기억해주었으면 좋겠군요.

난 아직 죽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나중에 슬퍼해줄 생각이라면 지금은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해요.
웃는 얼굴로 만나러 와주세요. 내일 꼭 만날 수 있길 바라요.

메일은 짧고 충격적이었다. 그는 왜 갑자기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계속 혼란스러웠다.
익숙한 모습으로 나타날 생각이었다면, 평소 자주 찾던 곳에서
만나자고 했겠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변두리의 외딴 식당을 힘들게 물어물어 찾아오니
그 낯선 장소에는 이미 나를 기다리는 그가 있었다.

– 오랜만이네요.
– 그러네요. 오랜만이군요.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앉으라는 신호를 한다.
그렇게 우리는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내 머릿속은 온통 궁금한 질문으로 가득차서 짧은 적막도 아주 길게 느껴졌다.
얼굴이 까맣게 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얼굴의 그였다.

– 어디가 아픈거예요?
– 간암이랬나….. 그렇다는군요.
– 얼마나 안 좋은거예요?
– 아직은 시간이 있댔어요. 6월 13일.
–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이르군요.
– 안 그러면 지금 만날 명분도 없을 것 같아서.

그는 약간 부끄러운 듯, 눈을 바닥에 두고 수줍게 웃는다.
내가 좋아하던 표정. 지금까지의 어색했던 공기가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작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어쩔줄 몰라하고 있다.
때마침 가게 종업원이 무언가를 가져왔다.
다 식어서 온기가 없는데다 조금 불은 국수.

– 이거 기억나요? 그 해는 정말 국수를 많이 먹었는데.
– 그거 정말 맛없었죠.

국수 가락은 입안에 넣기가 무섭게 후두둑 끊어진다.
아직 씹지도 않았는데 면발은 벌써 뭉개지고 있다.
장마가 한참이던 그 해 여름에 겨우 찾아낸 식당의 국수도 정말 이렇게 맛이 없었다.

– 이렇게 다 불고 식은 국수를 꼭 당신하고 먹고 싶었어요.
– 맛없는 것도 추억하고 싶어서요?
– 맛은 모르겠고, 그 날의 기억이 좋아서.

뭉개진 식은 국수를 위장속에 꾸역꾸역 밀어넣고 식사를 마쳤다.
이런 식사를 다시 해보고 싶었다니 모를 사람이군.
저 멀리서 책을 보고 있던 종업원이 와서 그릇을 치워주고 식탁을 닦아주었다.
탁자에 햇볕이 든다. 까맣던 그의 얼굴이 더욱 탁해보인다.

– 세상이 좋아져서 이제는 죽을 날도 미리 알게 되는 군요.

그는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완전하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좋지 않나요?
– 완전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죽음앞에서는 누구도 완전하게 미련을 떨칠 수 없을 겁니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도요.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죠. 아무리 준비를 해도 끝날 것 같지가 않다는.

그가 왜 이런 변두리 식당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알 수 없는 조용한 여자.
음악소리도 없는 적막함. 특별할 것도 없는 메뉴와 맛없는 음식.
그 덕분에 손님이라고는 우리 두 사람뿐.

– 고양이는 잘 있어요?
– 루이 녀석은 새 주인을 만났어요.
– 왜…?
– 힘들지 않을 때 보내는게 낫지 않겠어요?
– 미안해요. 그런걸 물어봐서…
–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를 만나주고, 밥도 같이 먹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그 날의 허기를 달랬던 맛없는 국수를 기억하게 해준 얼굴을 다시 보면
  숙제 하나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나봐요.

그는 내 얼굴을 한 번 빤히 바라보고는 물을 들이켰다.
만나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다 물어볼 참이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 두 달쯤전에 뻐꾸기 시계를 샀어요. 그 때는 내가 왜 아픈지도 몰랐었죠.
  그런데, 6월 13일을 알고난 후부터는 뻐꾸기가 울 때마다 저걸 왜 샀을까 후회했어요.
  죽음을 재촉하는 전령처럼 생각이 되더라구요.
– 아아.. 저런. 시계는 어떻게 하신거예요?
– 하하하. 너무 짜증이 나서 배터리를 빼버렸어요.

오랜만에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보기 좋다.

– 그러니까.. 그렇게 말입니다. 지금은 모든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바뀌었어요.
  맛없는 식사도, 당신이 와 준 것도. 이렇게 흘러가는 모든 1초, 1초가…
– 당신과  더 많은 시간을 이렇게 보내고 싶었는데…
– 웃으면서 식사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식당 벽면에 낡은 신문기사가 너덜거린다. 각종 미디어가 극찬한 맛집.
너덜거리는 신문지처럼 내 머릿속을 들쑤시는 6월 13일.
이 모든 순간 순간이 영원처럼 길고 또한 찰나처럼 짧다.

– 전화하면, 남은 시간중의 얼마간을 또 저에게 써줄래요?
– 당연하죠.
– 참 짧네요. 인생이라는 거.
– 누가 할 소릴…

오늘 만나서 시간이 흘러가 버린 것처럼 탁자위의 햇볕이 절반쯤 사라졌다.
사라진 시간이 아쉬웠던 나는 햇볕이 드는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의 야윈 어깨에 기댄다.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고, 졸음이 쏟아지는 것 같다.
햇볕이 반토막난 탁자, 플라스틱 물컵 두 개가 시야에서 잠겨들었다.

– 꿈은 잠들고, 현실이 깨어나다. @A-RA.COM –

당연한 일

반장이 특별활동부 이름을 호명하자,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손을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 특별활동으로 가입하고 싶었던 시사연구부는
가입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이 각 반마다 2인이기때문에
누군가 한 사람은 다른 특별활동부에 가입을 해야했다.
단짝이던 두 사람은 내가 빠져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던 중에 Y가 제안했다. 그럼,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자.라고.

그렇게해서 나의 도서부 생활이 결정되었다.
단짝인 그애들은 손을 맞잡고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지만,
이겼다 한들 이 무덤덤함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큰 기대가 없었던 탓에 실망도 적었다.

* * *

길게만 느껴졌던 그 해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는 즈음이었다.
며칠을 벼렀던 이야기를 오늘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나는 독서실 입구에 도착해서야
운동화를 고쳐신는 시늉을하며 Y에게 말을 꺼냈다.

– 내일부터는 그냥 동네 독서실에 갈래.
– 왜, 갑자기?
– 집까지 너무 멀어서 힘들어.
– 내가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면 안돼?
– 날도 추운데 뭐하러. 난 그게 편할 것 같아.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 된다.
그 표정을 모른채하고 얼어붙은 계단을 앞장서 내려간다.

– 특별활동부 결정할 때, 수정이가 졌으면 좋았었겠다는 생각. 가끔 한다.
  그랬담 너랑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을텐데.
  이제 2학년 되면 너는 이과반 갈테고, 같이 있을 시간도 별로 없잖아.

등뒤에서 들리는 울음이 묻은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얼굴에 반사된 겨울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창백한 얼굴이 아픈건지 슬픈건지 알 수가 없다.
손을 내밀어서 계단위에 서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 시간이 흐른다는건 재밌네. 뭐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가 없어.
– 뭐가?
– 너 그 날 수정이랑 손잡고 좋아하면서 다행이라 그랬었어.
– 그 때는 너랑 친해질지 몰랐으니까.
– 내일도 우리가 이렇게 친할까?
–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무서운 말 하지마.

* * *

우리에게는 내일을 보는 눈이 없다.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변하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어제의 일이 지워지거나 바뀌지는 않을텐데
이상하게도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해서는 냉담하다.
그런식으로 그녀는 내 시간에서도 멀어져서 완전히 떠나갔다.

스스로는 예측 가능한 변화에 대해서 마음의 준비를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된 후에도 쉬운 일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나빴던 경험으로 미루어 다가올 나쁜 일을 짐작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며
불행한 현재를 사는 바보 같은 나.

– 그런 우울들이 이어져서 인생이 되어가다. @A-RA.COM –

나쁜 어른

” 있잖아요. 선생님. 제 독후감이 잘못 된건가요?
  형들은 나쁜 사람이지만, 한스는 착한 사람이라서…
  공주님과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게 된 것 아니예요? “

그 애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글썽이는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간절함이 보이지만,
이제 나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늘 좋은 일이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하니? “
” 착하게 살면 하늘이 착한 이를 도우니까요….
  공주님도 한스의 착한 마음을 알아준 것 아니예요? “

너는 그렇게 순진하게 자라나서, 승냥이들의 먹잇감이 되는거야.
이야기속에서 교훈을 찾는 것은 책을 읽는 사람의 몫이지만,
나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생각하려는 너를 바로잡아주어야겠다.

” 한스는 왜 왕이 되었을까? “
” 한스는 공주님의 세 가지 문제를 다 맞추었고…
  공주님 마음에 들게 되어서… 공주님과.. 결혼을 하게 되어서.. “
” 사실은 간단한 이유란다.
  한스가 왕이 된건 공주가 사리분별력이 없어서다.
  퀴즈 두세 개를 맞추었다고 나라를 책임지는 왕이 되는 것이 올바르겠니? “

아이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얼굴이 굳었다가, 곧바로 으앙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 초딩에게도 주관이라는게 있는거지만… @A-RA.COM –

선물

오랜만에 맞이하는 소란스러운 아침이었다.
내일이면 여름방학이 시작된다는 것에 모두들 들떠 있었기때문에
향이와 나는 그런 분위기를 피해 수돗가 옆의 한적한 계단에 앉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향이와 나 사이에 아침 햇볕이 내리쬔다.

” 한여름의 부산이라니 바다도 있고, 좋겠다. “
” 별로 그렇지도 않아. “

향이가 애써 말을 건냈지만, 우리는 이내 조용해졌다.
한참을 또 그렇게 잠자코있던 향이가 어? 하고 정적을 깨뜨렸다.
촛점없이 흐려진 내 시야로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저 멀리에서부터 농구공을 튀기며 이 쪽으로 오는 모습이.

” 저 애, 남자애 아냐? 왜 우리학교에 있지? “
” 무슨 소리야? 쟤 우리반이야. “
” 에-? 거짓말!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 “

왜 항상 저렇게 짧은 머리를 하고 다니는 걸까?
저렇게 눈에 띄는 녀석을 한 학기내내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쪽이 오히려 거짓말 같았다.
뭐.. 녀석은 심지어 선배언니들에게도 남학생으로 오해를 사곤하니까,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 나 쟤랑 같은 학교 졸업했다구. “
” 진짜? 우와. 짱이다…. 완전 남자애 같애! “
” 쉿. 야.. 들리겠다. “

볼이 빨갛게 상기된 녀석은 아무 것도 모른채 향이와 내 옆을 지나쳤다.
같은 반이라고는 해도 큰 키에다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때문인지
말 한 마디 걸어본 적이 없다. 그저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 뿐.
녀석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이제 들어가야겠어. 선생님 오실 시간이야. “
” 아.. 아쉽네. 건강하게 잘 지내. “
” 고마워. 너도 잘 지내고. “

향이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향이의 따뜻한 온기가 바람과 함께 금방 사라진다.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서 재빨리 뒤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웃는 얼굴로 인사하기로 마음먹는다.
향이가 복도끝까지가서 안 보이게 될때까지 한없이 바이바이를 하며.

” 너. “

향이가 사라지는 쪽을 한참 바라보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벽에 기대서 있던 그 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노려보고 있었던건지,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왠지 나쁜 짓을 들킨 것 같은 당황스러움에 허둥대고 만다.

” 아.. 그.. 그게 너를 놀리고 있던게 아닌데… 다른 반 친구가.. 너를 잘 몰라서… “
” 못 보겠네. 이제. “
” 응? “

녀석은 잠깐 뜸을 들이며 말을 끊었다.
향이와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녀석과는 잠깐의 침묵도 참기 힘들다.

” 전학 간다며? “
” 아.. 응. “

전학간다는 건 우리반 아이들 모두 한 달전부터 알던거잖아. 새삼스럽기는.
귓속이 우웅하며 울리고, TV속의 인물과 대화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는 녀석의 모습 또한 어색하다.

” 우리, 같은 학교 졸업했었지? “
” 으응… “
” 친해지고 싶었는데… “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열심히 머릿속에서 기억을 되짚어보지만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적도, 특별한 추억도 없다.

” 이거. “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내미는 녀석의 새하얀 손.
우물쭈물 하는 내 손에 직접 쥐어준다.

” 편지, 써줄거지? “
” …. “

끄덕끄덕.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거의 속삭이듯 기다릴게 하고는 교실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열네살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 (….) 고치고 또 고쳐도 삐끕. @A-RA.COM –

17.2GB

다운받아놓고 습득하지 못한 87GB의 강좌 동영상은 내 것이 아니니 접어두자.

이력서.doc, 사본_이력서.doc와 사본_사본_이력서.doc, 입사_지원서.xls,
2009년_포트폴리오.zip들로 가득한 23.5GB의 구직 폴더와
틈틈히_썼던_일기들.txt, 가끔_그리던_그림들.psd의 11.7GB
백업해둔_7년여간의_개인메일.eml 2.3GB
그리고, 인생의_즐거웠던_날.jpg들이 들어있는 그녀와의 기억이 17.2GB

잠깐동안 머릿속의 회로는 17.2GB와 37.5GB의 크기를 계산해본다.
물리적으로는 서른해 동안의 37.5GB이 인생의 즐거웠던 날의 17.2GB보다 크지만
인생의 즐거웠던 날의 17.2GB는 결코 아무 것과도 겨루어서 질 수가 없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러나 그것은 내 인생에서의 크기일 뿐, 그녀에게는 0KB일지도 모를일이다
파일이 생성된 시간과 삭제되는 시간은 모두 하드웨어 주인의 것이니까.

– 심지어, 저장 제한 용량까지도. @A-RA.COM –

아르고스 (Argos)

퇴근시간 전에 아슬아슬하게 회의가 끝났다.
자리로 돌아와 퇴근 준비를 하려고 보니, 책상 위에 낯익은 쿠키 봉지가 놓여있는 게 보였다.
주변 동료들의 책상위에도 똑같은 과자가 놓여있는 걸 보니, 그녀가 다녀간 게 틀림없었다.
모두들 그들이 헤어진 것을 알고 있는데도 계속되는 그녀의 호의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배려에 그 주인공의 심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겠지.

” 누가 준거예요, 이거? “

상황을 알리 없는 신입이 멋모르고 묻자, A의 표정이 굳어졌다.
못 들은 척 가방만 열심히 챙기고 있는 A.

” 산타 클로스라고 해두지. “

나는 신입에게 더 이상 궁금해하지 말라는 의미로, 손가락으로 쉿 표시를 하고
가방을 챙겨든 A의 등을 떠밀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조용한 퇴근을 위해 곧 시끄러워질 사무실앞의 복도를 지나
일부러 조금 떨어져 있는 비상용 엘리베이터로 발길을 옮겼다.

1… 2… 3… 엘리베이터가 14층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다.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A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발끝만 바라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숙인채 말한다.

” 그런 기분 알아요? 세상끝으로 간다고 해도 나를 찾아낼 것 같은… “
” 헤어진거 아니었어? “
” 벌써 2년전에 헤어졌죠….. “
” 자네가 다른 사람을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
” 그것도 해봤어요. “

그는 텅빈 눈을 들어 복도옆 창문으로 희미하게 날리는 눈발을 바라본다.
사랑이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그가 사랑을 힘들어 하는 것일까?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어느날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서 그러더군요.
  도대체 너는 목숨이 몇 개냐구요. “
” 무슨 말이야? “
” 최근 헤어진 여자친구를 좋아했어요. 너를 목숨보다 아낀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목숨이 몇 개길래, 다른 여자에게도 줄 목숨이 있냐는 거죠.
  그걸 어떻게 그녀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텅 빈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만 타고 문이 닫힌다.

” B씨. 아르고스 아세요? “
” 아르고스? “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요. 뒷통수에, 정수리에 눈이 달렸다고 하기도 하고,
  전신에 눈이 달렸다고 하기도 하고, 눈이 백개나 달렸다고 하기도 하죠.
  어느 것이 정설인지 알수 없지만, 특정 대상을 감시한다면 그 대상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시의 눈을 가졌다는 말일거예요. “

9… 8… 7… 정적이 흐른다. A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 그렇다면 자네에겐 그를 잠재울 헤르메스의 피리가 필요한걸까? “

침묵을 깨고 내가 한 마디 하자, 그는 도리질을 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 이상하죠? 이렇게 나를 감시하는 그녀의 행동이 몹시 싫으면서도,
  한 없이 사랑스럽거든요. 내 안의 나는 그녀를 증오하고 있고,
  또 하나의 나는 미칠듯이 그녀를 사랑해서 역으로 스토킹하고 있지요.
  또한… “

갑자기 위협적인 표정으로 내 가까이로 불쑥 들이 밀고는

” 남들에게 베푸는 호의조차 못 견디게 질투나구요.
  B씨의 가방안에 있는 쿠키 같은거요. “

돌변한 A의 태도에 오싹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중,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그는 다시 다정한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 헤르메스의 피리는 제가 아니라 그녀에게 필요할 겁니다.
  여기 들렀던 그녀가 쿠키만 전해주고 어떤 놈의 차를 타고 가더군요.
  GPS 추적중이거든요. 내일 뵐게요. “

– 생각하던대로 써지지 않았네요. (….) 내공이 부족한 듯 @A-R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