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 컴플렉스

매일을 그와 함께 보낸다.
같이 커피를 마시고, 웃고,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불안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 뭘 그렇게 보는데? “
” 아니.. 그냥.. 좋아서.. “

딸그락 소리가 나게 커피잔을 놓은 그는 나를 바라보며 웃어준다.
그 미소는 마치 메뉴얼처럼 너무나 반듯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래. 이 모든 것은 라라때문이다.
젠장할. 라라.

심리학에서는 강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기억이나 관념을 [컴플렉스]라고 하는데,
좀 더 직설적인 설명을 곁들이자면, 무의식적 열등감을 말한다.
이런 컴플렉스가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내게는 무엇보다
그것이 너무 일찍 찾아온 것이 문제였다.
그것도 언제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치명타를 날리는 주범으로 말이다.

* * *

‘ 아아. 있다. 있다! ‘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내 눈에는 오로지 ‘그 것’만 보였다.
쇼윈도 밖에서 유리를 짚고서서 나는 안도했다.
갈색의 곱슬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채 미소를 짓고있는 라라는
척 보기에도 열살짜리에겐 너무나 고가품이었다.

” 유리에 손자국 내지 말고, 들어와서 구경하지 그래? “

은색 새시를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민 주인 아주머니가 나에게 말을 건냈다.
가게 안으로!!?

” 그래도 되나요? “
” 들어와서 보렴. 거기서 뭐가 보이니? “
” 고맙습니다! “

가까이서 본 라라는 유리문 밖의 모습보다 훨씬 예뻤다.
생기있는 핑크빛 뺨. 윤이 나는 머릿결. 눈동자는 또 얼마나 천진한가!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 엄마에게 말씀드려서 사달라고 해. “
” ….얼만데요? “
” 뭘 사고 싶은건데? “
” 이거요. 라라. “
” 아아, 그건 삼천 오백원이지. “
” ….와아…. 비싸다… “
” 그건 싼 편이야. 옆의 다른 인형을 봐. 보통 사천원이 넘는단다.
  옆에 금발머리 미미는 어떠니? 종류별로 있어서 잘 팔리지. “
” 전 이게 좋아요.. 저기 그런데, 내일 또 와서 구경해도 되나요? “
” 그러려무나. “

라라.
버스에서 내리면 집보다 먼저 달려갔던 완구점의 라라.
라라의 몸값은 매일 어머니께 버스비를 백원씩 받는 나에게 꿈같은 액수였다.

무엇보다 마론인형따위는 어린애들이나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라고
미리부터 단정지어버리셨던 부모님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생일 선물로라도 한 번쯤 졸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 아주머니, 라라 아무한테도 파시면 안돼요. “
” 그럼 엄마를 졸라서 사달라고 해. “
” 우리 엄마는 이런건 애기들이나 가지고 노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 너보다 훨씬 나이 많은 언니들도 많이 사가는 걸. “
” 엄마는 사주실 생각이 없으실 거에요. 전 한번도 이런 인형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
” 그래도 말씀드려보지 그러니? 아빠에게라도 말씀 드려봐. “
” 아빠는.. 헤헤.. 무서워요. 아빠는 제가 책 읽는걸 좋아하세요.
  그래도 팔지 마세요. 제가 꼭 살거에요. “
” 후후… 너 그 소리 한지 벌써 한달이 지났어. “
” 전 용돈을 받지 않으니까, 쉽게 모아지지 않아서요.
  엄마에게 과자 사달라고 하고 조금씩 모아야 해요. 그러니까 팔지 마세요. “
” 알았다. 알았어. “

나는 그렇게 하루에 세번씩 라라를 보았다.
피아노 레슨을 가는 길에는 가게 밖에서라도 라라가 있는지 봐야지만 안심이 되었다.
누가 나보다 먼저 사갈까봐 노심초사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싼값에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에 나와서 그리로 이사를 가게되었다고 설명하셨다.
내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그 집은 지금 살고있는 집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 할만큼 먼 거리였다는 것 밖에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완구점으로 달려갔다.
라라를 수 십번도 더 보고, 또 보았다.
아무래도 내 평생에 녀석을 만날 일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나중에라도 만나게 된다면 잊지 않기위해 그렇게 얼굴을 외우고 외웠다.

윤이 나는 갈색 곱슬머리의 라라.
삼천 오백원보다 더 모아야겠네. 버스비가 있어야겠어.
그 때까지만 참아줘.

* * *

인간의 욕망이란 끝이 없다.
가지고 싶은 것은 끝없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그렇지만, 그런 좋은 것이 내 앞에 나타날 때마다 나는 움찔했다.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쇼윈도의 라라처럼 내 손에 한번 닿아보지도 못했다.
간절하게 원할 수록 가질 수가 없는 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 같았다.

” 아까부터 뭘 자꾸 그렇게 바라보는건데? 무슨 일 있어? “
” 아니, 그냥. 너를 보고 있으면 나는 열살로 돌아가는 것 같아. “
” 회춘하는 기분인거야? “
” …. 마즈까? … “
” 아아.. 잘못했어요.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막는 시늉을 한다.
귀엽다.
그리고 습관적인 불안이 뒤따라온다.

좋아해버리면 안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감정을 냉각시킨다.

” 원하는 것을 전부 다 얻는 인생이 있을까? “
” 없지. “
” 간절히 원하는 것 하나정도는 얻는 인생은 있겠지? “
” 그 정도는 있겠지만…? “
” 원하는 것을 하나도 못 얻는 인생은 있을까? “
” 음.. 글쎄? 없을 것 같지만…? 근데, 그건 왜? “
”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기분이 어떨까해서. “
” 뭐 가지고 싶은거 있어? “
” 아니. 그런건 아니고…. “
” 아니고, 뭔데에에?? 응? 뭔데 뭔데 뭔데..? “

녀석은 사정을 모른채 뭐가 가지고 싶은건지 쫑알쫑알 캐묻는다.
그래. 그의 말대로 원하는 것을 하나도 못 얻는 인생이 없다면
내 인생에도 간절히 원하는 것 딱 하나쯤은 가질 수 있게 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게, 내 앞에 있는 너라면
내 인생에 딱 하나라고 해도 안되는 걸까?

– 라라. 망령된 관념. @ARA.PE.KR –

예언

몹시 아름다운 9월이다.

6월의 나는 그와 헤어지게 될 것을 몰랐고,
7월의 나는 위로받게 될 것 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지금은 10월의 나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를 품에 감싸 안으며 너는 말했었다.

” 어제 나를 좋아했어? “
” 응. “
” 오늘은? “
” 좋아해. “
” 내일은 어떨 것 같아? “
” 아마도 좋아할거야. “
” 인생이란 말이야. 이 사흘의 연속이야.
  이 사흘 이 외의 날은 없어. 그러니, 오늘처럼 그렇게 살아주면
  다음 달도, 내년도 두렵지 않을거야. “

그래. 너의 말이 맞았어.
오늘의 나는 내일의 너를 좋아해.

–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은 나. @ARA.PE.KR –

허쉬초콜렛 같았던 그 애

첫 맛이 진하고, 끝 맛이 쓴 허쉬초콜렛.

소년이 있었다.
나에겐 그저 동경이었던 소년.
내게 한 번 말을 건넨 적도
눈길을 준 적도 없는 소년.

갈색 머리카락을 부서지듯 날리면서
계단을 달려 내려오던 그 소년이
바람을 일으키며 내 곁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설레어 죽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 다리를 다쳐
몹시 절며 귀가하던 소년의 뒤를 밟아
그의 뒷모습이 사라진 집을
가만히 올려다 본 기억이 있다.

누군가의 애정어린 손길로
지붕까지 얌전하게 틀어올린 담쟁이가 있는 베란다.
말소리가 들려 올 것 같은 따뜻한 불빛이 비치는 창가.
마치 동네에서 그 집만 달랑 오려낸 듯
딴 세상같은 느낌을 주는 집이었다.

소년이 보고싶어 몸살을 앓았던 겨울.
교복 주머니에 허쉬초콜렛을 넣고
그 집앞을 지키고 서서 무작정 그 애를 기다렸다.
철 없는 열일곱 –
전해줄 용기도 없었으면서.

두 시간을 그렇게 추위에 떨다가
소년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그 날
마음처럼 감기몸살에 시달려 며칠을 끙끙 앓았다.
몸도 마음도 너무 추웠던 겨울이었다.

그리고,
그냥 바라보기에도 아까웠던 그 소년은
내가 어떤 인연을 기대하기가 무섭게
이사를 가 버렸다.

나는 아직도 그 애의 모습을 기억한다.
도무지 사랑이라 말하기엔 너무나 투명한 기억.
요즘도 가끔 그 애가 생각 나곤 한다.

한 번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던.
너무나 쓰게 이사를 가버렸던.
허쉬초콜렛 같았던 그 애 –

– ara@ara.p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