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왕은 공주를 웃게하는 사람을 부마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기사가 되려고 수련하던 남자도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곧 검수련을 그만두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수집하느라 애를 썼다. 노력끝에 남자는 술집의 모든 이를 웃길 수 있을만큼 재미있는 사람이 되자 드디어 궁에 갈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궁에 당도하여 공주를 웃겨보겠노라고 말한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괜찮다. 오늘 아침에 공주가 그냥 웃더라고. 그래도 … Continue reading “권태”

5789995211호의 소원 -2

달토끼는 내가 준 과자를 갉아대며 먹었다. 떠들어대거나 과자를 먹거나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머릿속의 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너무하다. 물론 나는 조금전에도 우연찮게 20년전과 같은 소원을 빌었다지만 그렇지 않고 아무때나 소원성취가 발현되면 오히려 폐를 끼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응?” 토끼는 과자를 먹는데 정신이 없다. 배가 고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저에게는 필요없는 소원이면 어떻게 … Continue reading “5789995211호의 소원 -2”

5789995211호의 소원

정월 대보름의 밤이었다. 특별한 일도 없었고, 외로운 기분이 들어 퇴근길에 맥주 두 캔과 새우깡을 샀다. 편의점을 나서는 내 발걸음을 보름달이 비추고 있었다. 저 달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었지만,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으니 그건 그저 마음의 위안에 가까운 허구일 것이다. 하지만 외롭다. 달에게라도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외롭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다시 … Continue reading “5789995211호의 소원”

재활용 택배

현관벨 소리에 잠이 깼다. 동이 틀 무렵에야 연습을 끝내고 겨우 잠이 들었는데. “택배예요.” 짜증이 오백퍼센트 차서, 욕이 육성으로 터져나올 것 같다. 지금 나가요. 악을 쓰듯 소리치고 주섬주섬 겨우 일어났다. 최근에 뭘 주문한게 있던가? 잠이 덜깨어 정신이 몽롱하다. 상자를 열어보면 내가 뭘 주문했는지 기억나겠지. 문앞에는 30대가량의 젊은 택배 직원이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배수지씨, 본인이세요?” 대답도 귀찮았던 … Continue reading “재활용 택배”

호객꾼

“호루라기 필요없어요?” 토끼는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왔다. 쓸데없는 물건들을 줄줄이 읊으며 따라온게 100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다. 그녀의 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그녀는 손사레를치며 토끼에게서 멀어지려했다. 토끼는 지구끝이라도 쫓아갈 기세로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누나, 호루라기 진짜 필요없어요?”“…….”“있으면 엄청 좋은데. 호신용으로 최곤데.”“…….”“후회없음이야. 진짜루.”“……”“누나처럼 예쁜사람에겐 머스트 헤브 아이템이라니까.” 토끼에게 대꾸 하지 않고 계속 걷는다. 도대체가 말도 안되는 물건을 영업하는 토끼와 … Continue reading “호객꾼”

사랑만큼의 우정

방학식이 끝났다. 1학기 종료와 함께 내 우정도 끝났다. 세 명이 우정을 쌓으면 한 사람이 따돌려지기 마련인데, 사교성이 별로 없는 내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친구들의 절교선언은 세상이 끝나는 것만큼 어질어질한 기분이 들게 했다. 평생을 쌓아갈 우정이라고 해놓고 절교라니.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친구를 사귀는 일은 연애만큼이나 힘든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영화 ‘라붐’의 여주인공 ‘빅’처럼 청춘을 불사르는 열다섯이 … Continue reading “사랑만큼의 우정”

전학생

짝꿍은 책받침으로 입을 살짝 가린채로 말했다. 이전 학교에서 사고를 쳐서 퇴학을 당한 애라고. “너도 쟤랑은 말 안 섞는게 좋을걸.” 쉿. 듣겠다. 그제서야 잦아드는 짝꿍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학생은 3분단과 4분단 사이 복도를 도도한 표정으로 지나간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정수리까지 올려 묶은탓인지 눈이 미묘하게 치켜올라가 인상은 더욱 사나워보였다. 그렇게까지 올려 묶었는데도 긴머리는 타박타박 걸을때마다 팔꿈치에서 찰랑인다.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도 … Continue reading “전학생”

전사(轉寫)하던 노인

20대의 어느 여름. 알바를 한참 구하던 때여서 몇 군데에 면접을 본 날이었다. 이미 오후 느즈막한 시간이었지만 날은 여전히 더웠고 마지막으로 면접 장소는 찾아가기도 힘든 외진 곳에 있었다. 몇 번이나 전화 통화를 하면서 위치를 물어물어 알아냈는데 비좁은 주택가 골목 사이에 허름한 시멘트 건물이 나타났다. 오래된 70년대식 가정집이었다. 열기를 식히려고 물을 뿌려둔 젖은 마당을 지나, 반쯤 열린 현관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부엌에서 … Continue reading “전사(轉寫)하던 노인”

닥터 에이전트 (Dr. Agent) – 1

퇴근길 전철역 계단에는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나오고 들어가고 있다. 출입구까지 나가는 길은 걸어간다기보다 휩쓸려 간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계단을 헛딛지 않으려 바닥을 보고 걸었지만, 앞사람에 가려 좁아진 시야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을, 더구나 인상착의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출구를 겨우 빠져나와 … Continue reading “닥터 에이전트 (Dr. Agent) – 1”

100년 하고도 64년 후의 봄

계단 층계마다 융단처럼 돋아있는 이끼위로 따뜻한 햇볕이 쏟아진다.무성하게 자란 잡초때문에 정원은 마치 정글과 같았다.노인은 의례 그랬듯 바깥으로 나와 나무 그늘에 앉았다.그는 잠깐동안 건물 꼭대기의 다락방 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 생명체에게는 시간과 장소가 모두 중요하다면서요?  시간과 장소의 강은 운명에 맞서는 것으로 건널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용도 해치웠고, 키스도 했는데 어째서 그녀는 깨어나지 않는겁니까? “ … Continue reading “100년 하고도 64년 후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