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왕은 공주를 웃게하는 사람을 부마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기사가 되려고 수련하던 남자도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곧 검수련을 그만두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수집하느라 애를 썼다. 노력끝에 남자는 술집의 모든 이를 웃길 수 있을만큼 재미있는 사람이 되자 드디어 궁에 갈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궁에 당도하여 공주를 웃겨보겠노라고 말한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괜찮다. 오늘 아침에 공주가 그냥 웃더라고. 그래도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으니… 여봐라. 저 자에게 차비라도 챙겨줘라.”

그녀는 옷에 붙은 보풀을 뜯고 있다. 머리도 약간 헝클어져 있고, 억지로 한 화장은 들떠있다. 나라고 열심히 차려 입고 나온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녀의 낡은 차림이 우리의 연애가 낡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싫을 때가 있다.

“재미없어? 내 얘기?”

“아.. 어디까지 말했더라?”

“세계가 둘로 나뉘어져서 똑같은 사람이 살아갈지 모른다는 가설까지…”

“응. 계속 얘기해.”

그녀는 식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들어줬으면 좋겠지만 그런 기대를 하면 안된다. 벌써 오래된 일이다. 애써 이야기를 해봐야 응수해주는 법이 없으니까, 나 역시도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그만이다. 상관없다.

“영화 시작 시간 다됐는데, 미리 일어날까? 팝콘 먹을래?”

“그럴까?”

처음의 그녀는 영화 데이트가 제일 시시하다고 했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제일 한심한 데이트라고. 그녀는 내 자취방의 오래된 보일러처럼 미지근하기만 하다. 아니, 우리의 연애가 미지근해졌다고 해야하나…..

그녀와 카페에서 보내던 시간은 길기만 했는데, 영화는 순식간에 끝났다. 우리는 영화를 조금 아쉬워하며 나왔다. 그녀가 먼저 말을 떼었다.

“재밌네.”

“응. 그러게.”

싸운 것도 아닌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정적이 흘렀다. 내 머릿속은 온통 영화장면으로 꽉 차 있다. 이렇게 저렇게 한 이야기를 오늘 페이스북에 올려야지… 그녀가 다시 말을 걸었다.

“밥은 집에서 먹을건가?”

“먹고 갈래?”

“그러자.”

밥을 같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집에서 혼자 챙겨먹으려면 너무 귀찮은 탓이다. 그건 아마도 그녀도 같은 마음이겠지. 우리는 더 이상 맛집을 가지 않고 그저 허기를 달랠만한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따라들어온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제 묻지도 않네?”

“뭘?”

“맨날 여기잖아!”

“왜 그래? 새삼스럽게…”

“새삼스럽게? 그래.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아줬게? 어떻게 한 번을 뭐 먹고 싶냐고 묻지도 않냐?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녀가 흥분한다. 끼어들 틈이 없는 말을 쏘아 붙이고 씩씩대는 동안 나는 어쩔줄을 모른다. 늘 괜찮았잖아..? 오늘 왜 갑자기 그러는거야? 언제 새삼스러워야하는지 난 잘 모르겠다.

“벙어리니?”

“아니.. 미안해. 생각을 못했어. 담엔 물어볼게. 일단 배고프니까 뭐라도 먹자.”

“됐어. 밥 맛 떨어져. 갈래.”

그녀는 외투도 벗지 않은채 앉았다가, 가방만 챙겨들고 휙하고 나가버렸다. 나는 분식집 한 켠에 쪼그리고 앉아 아주머니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 죄송합니다 하고 나가야하나? 어차피 그녀를 따라가서 붙잡을 생각도 아니었기에 곧바로 그 생각은 머리에서 지워졌다. 공허한 머리와 뱃속은 에너지를 원한다. 비난을 받은 자리에 꿋꿋하게 앉아 김밥과 라면을 시키고 꾸역꾸역 먹었다.

돌아온 자취방은 싸늘하다. 보일러는 돌아가는지 마는지… 그녀가 빙의된 것 같은 보일러는 씻는동안 뜨거운 물과 찬물이 번갈아 나온다.  괜히 화가난다. 보일러 온도를 맞추다 지쳐 그냥 미지근한 물로 씻고 만다. 아이 씨.. 그녀의 욕을 하면서 샤워를 마쳤다. 그 사이에 도착한 핸드폰 메시지가 떠 있다.

– 나 잡지도 않더라?

– 어차피 뿌리치고 갈거잖아.

– 어차피 배고플거 밥은 잘 먹던데? 나참 기가 막혀….

보고 있었나…? 갑자기 낯 뜨거워졌다. 뭐라고 말해야하지…? 그동안의 내 연애에 대한 노력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없는데 난 왜 무신경한 사람으로 몰리고 있는걸까?

– 야.. 답 없다. 너 정말. 나 오늘도 네 지겨운 얘기 참느라 엄청 노력했는데. 넌 어쩜 그렇게 배려가 없니?

– …….

입에 테이프가 발라진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속에서는 하고 싶은 말이 어마어마하게 맴도는데 어떻게 꺼내야할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거지? 내일 출근해야하고 피곤한데 그냥 넘어갈 수 없는걸까? 진부한 싸움이 계속된다. 누군가 양보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다.

– 됐고… 나도 너처럼 배려없는놈 만나느라 시간쓰고 참 한심한데… 그냥 경험이라고 치고…. 메신저로 이런 얘기 하기 싫은데 얼굴보면 또 화날거 같아.

– 야.

– 차단할게. 연락하지마. 빡치니까….

– 그게 아니잖아. 잠깐만. 전화 받을 수 있어?

메시지에서 없어지지 않는 숫자 1. 꺼져있는 전화기. 폭발할 것 같은 분노에 괜히 베개를 때린다. 네가 알아주지 않은 내 연애는 노력이었다고.. 그 얘기 너에게 해주려고 일주일 전부터 읽은 소설이었어. SF소설 좋아했잖아. 중국어 공부 하고 싶대서 같이 다니다가 그만둔 학원 교재, 그것도 저기 저렇게 쌓여 있잖아. 예전에 갖고 싶은 가방 사주려고 일한거. 너에게는 그냥 선물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그게 석 달동안의 내 시간이었다고….

오래된 보일러가 덜컥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제 고장나도 이상하지 않을 보일러는 참 열심히도 가동되고 있지만, 방은 미지근하기만 하다. 아마도, 다시 뜨거워 질일은 없을 것이다….

– 끝. @A-RA.COM –

5789995211호의 소원 -2

달토끼는 내가 준 과자를 갉아대며 먹었다. 떠들어대거나 과자를 먹거나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머릿속의 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너무하다. 물론 나는 조금전에도 우연찮게 20년전과 같은 소원을 빌었다지만 그렇지 않고 아무때나 소원성취가 발현되면 오히려 폐를 끼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응?”
토끼는 과자를 먹는데 정신이 없다. 배가 고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저에게는 필요없는 소원이면 어떻게 하실건가요?”
“어떡할게 뭐 있어? 헛수고 한거지. 아까처럼 인간의 변덕을 욕하면서 돌아가야지.”
“그런 헛수고는 드문 일인가요?”
“아니. 의외로 다반사야. 오히려 반겨주는 때가 드물지. 도와주려하면 필요없다는 식이야. 그래서 이 일이 너무 보람이 없어서 그만둘까 생각도 했다니까.”
“항상 늦어서요?”
“그건 좀 애매하네. 우주의 시간은 정확하다고 생각해. 이번의 경우도 늦긴했지만 너한테만 늦은거지 사실 난 제때 도착한거야. 그렇게따지면 우린 늦는법이 없어. 늘 적당한 때에 나타나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아까는 너무 늦었다면서요?”
“그래. 그게 네 입장의 이야기잖아. 이제 맥주 마셔도 될까? 목 말라.”
달토끼는 소파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내 옆에 앉았다. 아직 괜찮지 않아보였지만 수건으로 감싸쥐고 맥주를 땄다. 터져흐르는 거품의 얼마가 수건에 흡수되었다. 달토끼는 내게서 맥주를 받아들고 홀짝였다. 나는 별 말없이 앉아있었다. 달토끼도 얼마간 아무말없이 맥주만 홀짝이다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열 번도 넘게 나타났어야 할 내가 이제 나타난게 이상하지?”
“네…”
“작년 소원 기억나?”
“그냥 뭐… 아프지 않고, 직장에서 인정받고 싶다는거 였던 거 같아요.”
“이루어졌네.”
“….아닌데요.”
“보통은 자기가 다 가지고 있는걸 빌거든. 재밌지 않아? 스스로 할 수 있는걸 남한테 들어달라고 하고 있는게. 그렇게 비는건 소원이랄 수도 없지. 누구나 다 그런 인생을 살고자 생각하는걸! 그저 불행이 닥쳐오지 않게 해달라는건데 그건 우리 영역밖의 일이야.”
“그럼 도와줄수 있는 적절한 소원은 모호하지 않고 대중적이지도 않으면서 구체적이면 되는거예요?”
“뭐 그리 복잡한겨? 간절하면 돼.”
“건강하고 복된 삶을 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할 수 있잖아요.”
“그게 간절한 사람들은 시간을 더 가치있게 써. 건강을 위해서 애쓰고, 기도로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말이야.”
대화가 진척이 없는 것 같았다. 달토끼는 여전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노력해서 얻어지는건 소원을 빌어 얻어지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던가. 보통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신의 영역에 있어서 요행에 가까운 것이다.
“말동무 같은건 제 힘으로 어떻게 안되는거잖아요.”
“그러니까… 알려주러 온거야.”
달토끼는 맥주를 거의 다 마셨다. 그리곤 다시 과자를 갉아대기 시작했다. 약간 우물거리면서 더듬 더듬 말을 이었다.
“말동무 소원의 본질은 말동무가 아니야. 외롭다는 마음이지. 외로움의 크기는 달라도 누구에게나 있어. 보통은 잠깐의 외로움이 찾아와도 금방 그걸 깨고 나가는데 넌 그걸 잘 못했어. 외롭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안에서 나오려고 하질 않거든.”
“전 늘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어했는데요?”
“아니. 늘 혼자이고 싶어했어. 밥 먹는 것도, 귀가하는 것도 누군가 동행하면 즐거워하지 않았잖아.”
“그거야 마음에 맞는 친구가 아니었으니까요.”
“응. 이제 알겠지?”
“네? 알다니요?”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중에 너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네 자신뿐이다.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영혼의 단짝이 없는 기분은 남의 매력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아서야. 그게 외로움의 원천인겨.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만이 알지. 자존심때문일 수도 있고. 나르시즘일 수도 있고.”
달토끼는 색동조끼에 묻은 과자 가루를 털어내고 일어섰다. 앉아 있을 때도 작았지만 일어나도 여전히 작다.
“이루고 싶은게 있으면 본질을 봐. 허무맹랑한 바람이 아니라, 간절하게 얻으려는 것의 바닥 말이야…. 난 이제 가야겠다. 퇴근시간이야.”

달토끼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나도 일어나 달토끼를 따라갔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배웅이었다. 토끼는 예의 그 달걀만큼 조그만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아 혹시 오해할 거 같아서 한 마디 하자면….”
“네?”
“도우미는 목발과 같은거야.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일어서지도 못하는 사람에겐 목발이 무슨 소용이겠어? 소원을 이루어주는 사람은 자기자신이야. 그러니까 소원을 골백번 빌어도 내가 나타나지 않는게 정상이지.”
“……….”
“5789995211호는 진즉 폐기된 데이터였지. 네가 다시 같은 오더를 내려서 복구된거야. 네 자신은 알고 있을걸. 말동무를 위해서 맥주를 샀기에 기쁜 마음으로 온거야. 잘 마셨어. 네 덕에 오랜만에 실적 달성도 하고… 자 그럼….”
토끼는 조끼 주머니의 종이를 꺼내어 확인하고는 다시 접어 넣었다. 그리고 마치 유령처럼 흐려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꿈을 꾼 사람처럼 현관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었다. 시원하기도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뻔한 소리를 하다니…. 나는 여전히 꿈을 꾸는 것인가?
탁자는 여전히 흐트러져 있고, 달토끼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는 바닥 사방에 흩어져있었다. 그래도 조금전의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정말로 누군가와 대화가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나는 환상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거실 조명을 뚫고 창밖의 달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유령이건, 허상이건, 실제로 본 것이었건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올 해 정월대보름의 소원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제법 괜찮은 한 해가 시작되었다.

– 끝. @A-RA.COM –

5789995211호의 소원

정월 대보름의 밤이었다. 특별한 일도 없었고, 외로운 기분이 들어 퇴근길에 맥주 두 캔과 새우깡을 샀다. 편의점을 나서는 내 발걸음을 보름달이 비추고 있었다. 저 달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었지만,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으니 그건 그저 마음의 위안에 가까운 허구일 것이다.

하지만 외롭다. 달에게라도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외롭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다시 달을 힐끔 바라보았다. 정말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늘 있는 일이지만, 빈 집에 혼자 들어가는건 익숙해지지 않는다. 당장 외로움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어차피 흘러갈 소원이라면 어디에선가 말동무 하나만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말동무 하나 내려주세요라고 중얼 거린다. 왠지 좀 머쓱하다.

“나 원참. 무슨 망상이람…”

현관 도어락을 연다. 아무도 없는 집의 싸늘한 냉기가 나를 반겨준다. 그리고 그림자도.

“어서와!”

집에 누군가가 있었다. 꺄악 하는 내 비명이 아파트 계단을 울린다. 맥주가 담긴 봉지를 떨어뜨렸다.

“환영인사 치고는 격렬하네.”

꼬마애처럼 작은 실루엣이 말했다. 저건 뭐지? 사람은 아닌데, 귀신인가? 아무리 외로워도 귀신하고 대화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어질한 기분이 잠시 스쳐가고, 정신이 들었다. 스마트폰으로 112를 누르면서 소리쳤다.

 “누구세요? 왜 우리집에 있는거죠? 당장 나가주세요!”

작은 그림자는 한숨을 쉬었다.

“…신고까지 하려고! 반겨줘도 시원찮은데 이거 너무 하잖아. 나 엄청 오래 기다렸는데…”
“통화버튼 누를거예요! 무기 같은거 갖고 있으면 버리고 당장 나와요!”
“얘 진짜 점입가경이네.”
“셋 샐때까지… 하나.. 둘…”
“아, 외롭다고 징징댈 땐 언제고!! 나라고 뭐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얘기 상대가 필요하대서 출장온거야! 그렇게나 싫어할 줄 알았으면 나도 안 왔어! 괴한 취급까지! 별 꼴이야!”

작은 그림자가 현관으로 나왔다. 센서등이 켜졌다. 작은 그림자는 색동조끼를 입은 흰 토끼였다. 분명 나보다는 작았지만 토끼치고는 무섭게 큰, 그러니까 다섯살 꼬마애처럼 커다랬다. 토끼는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으로 주섬주섬 현관을 나오더니, 들어갈 때 벗어놓은 듯한 신발을 신었다. 달걀만큼 작은 신발이었다. 그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로 투덜거렸다.

“잘해주면 이 모양이라니까. 인간들이란!”
“잠깐만요. 얘기 상대라니, 무슨 말이예요?”
“왜 나한테 물어? 네가 달보고 소원 빌었잖아.”

뭐? 그게 진짜 이루어졌단 말인가? 그래서 지금 내가 토끼와 대화를 하고 있는건가? 헛것을 보는 것인가 잠시 헷갈려온다. 전에도 이런 환영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귀신도 뭣도 아니야. 네가 알고있는 달토끼라니까..”
“정말….?”
“맹세코.”
“……”
“……”
“…..이..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정체불명의 토끼를 집에 들이는 것이 맞는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소원이 이루어졌다지 않나? 나는 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달토끼는 믿음을 회복해서인지 기분이 좀 풀린 표정으로 신발을 다시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파위로 깡총 올라 앉는다.

“그거 맥주야? 나도 맥주 좋아하는데. 내꺼도 샀어?”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그 자리에서 멍하니 달토끼를 바라보는 나에게 달토끼가 말을 건다. 손에 쥔 봉지를 내려다 보았다. 그래. 분명 두 캔을 사긴 했지만, 달토끼와 같이 마시려고 산 것은 아니다. 좀 더 취한 기분으로 빨리 잠들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네.”

거실 탁자 위에 과자 봉지도 풀어놓고, 맥주를 꺼내놓았다. 과자를 풀어놓는 나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는 달토끼.

“나 새우깡도 좋아해.”
“네. 그러셔요..? 근데 왜 자꾸 반말을 하실까?”
“너보다 300살은 많거든.”
“거짓말.”
“얘는 진짜 아까부터 짜증나게? 너 속고만 살았냐? 난 300년을 진실되게 살았다고.”
“300년 넘게 사신 분이 현대어도 엄청 잘 쓰시는구만요.”
“시대에 맞춰 사는게 얼마나 빡센건데! 300년을 살면서 출장 소원 도우미를 하려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해야하는줄 아냐? 넌 대충 사니까 알턱이 있겠냐마는… 아… 캔은 따서 줘.”

가지 가지 하시네요. 캔은 두 개 다 찌그러져 있었다. 이거 그대로 까면 거품 폭발이거든. 공부 많이 한거 맞아?

“맥주는 좀 이따 마셔요. ……근데요. 그게 말이 돼요? 무슨 출장 소원 도우미니, 달토끼니… 여태 정월 대보름마다 빌었던 소원이 다 이루어졌으면, 열 번도 더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달랑 방금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여태 말한걸 다 믿으라니 제가 뭐 산타 믿는 초딩도 아니고요….. 솔직히 지금 제가 외로워서 미친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는데….”
“……너 뭔가 착각하고 있구만?”

토끼는 색동 조끼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역시 세월이 지나도 메모는 종이에 쓰는게 짱이라니까… 어디보자… 1993년 소원인데?”
“네?”
“1993년에 ‘아무나라도 좋으니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말동무라도…’ 라는 소원을 빌었고, 그게 5789995211호 소원이야. ….너 그 때 왕따였음? 왜 친구가 없어? 고등학생이었나? …. 뭐…. 300살에겐 고딩이나 중년이나 그게 그거지만.. 아무튼 쫌 미안. 너무 밀려서 오래 걸렸네. 헤헤…. 맥주 이따 줄거면 새우깡 줘.”

어처구니가 없었다. 10년도 아니고, 20년이 지나서 소원 들어주러 왔다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과자 한움큼을 집어준다.

“그래도 소원을 빈다고 다 이루어지는게 아니라서…. 막 중간중간 폐기되고, 번호가 중복 발급되기도 하고, 유실되기도 하고… 개판이지. 데이터라는게 다 그렇지. 달나라라고 뭐 그렇게 기술이 좋은건 아니라서… 넌 운 좋은겨…”

– 자러 갈래요… 짧은 1부 끗 @A-RA.COM –

재활용 택배

현관벨 소리에 잠이 깼다. 동이 틀 무렵에야 연습을 끝내고 겨우 잠이 들었는데.

“택배예요.”

짜증이 오백퍼센트 차서, 욕이 육성으로 터져나올 것 같다. 지금 나가요. 악을 쓰듯 소리치고 주섬주섬 겨우 일어났다. 최근에 뭘 주문한게 있던가? 잠이 덜깨어 정신이 몽롱하다. 상자를 열어보면 내가 뭘 주문했는지 기억나겠지. 문앞에는 30대가량의 젊은 택배 직원이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배수지씨, 본인이세요?”

대답도 귀찮았던 나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건네받은 상자는 작고 가벼웠다.

“서명해주세요.”

택배배달 바빠서 먹고 살기 힘들다더니 요즘에도 일일이 서명날인을 받는건가? 택배기사가 떠나고 집으로 들어온 나는 곧이어 상자를 뜯었다. 사슴무늬가 새겨진 갈색 스웨터가 들어있다. 주문한 기억이 전혀 없는 옷이었다. 상자뚜껑에 붙은 운송장을 확인해본다. 보낸 사람 김익명. 상품명 의류. 뭐야 이거…. 잘못 온건가 싶은데 받는 사람 배수지는 내 이름이 맞다. 혹시 연락처라도 있을까해서 상자안을 더 살펴볼 요량으로 스웨터를 꺼낸다. 역시나 종이 한 장이 깔려 있었다.

“…. 이 택배는 서울 신림동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한국을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 당신 손에 들어간 이 택배는 4일안에  당신이 사용해야합니다. 또, 행운이 필요한 7명의 사람에게도 당신의 물건을 택배로 보내셔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택배도 상관없습니다. 혹시 미신이라 여길지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뭐야. 행운의 편지인가. 나는 인상이 구겨졌다.

” …. 상도동의 박준영이라는 사람은 2010년에 이 택배를 받았습니다. 병특이 끝났던 그는 여친에게 7개의 택배를 부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뒤에 그는 코코소프트에 취직이 되어 개발이사로 역임하게 됩니다. 봉천동의 어떤이는 이 택배를 받았으나, 96시간 이내에 다른 이들에게 택배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는 곧 실직되었습니다….”

종이를 구겼다. 일단 이 사슴 스웨터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입고 싶지 않고, 상도동의 박준영보다는 미스에이가 더 잘나가는 것 같으니 무시하기로 했다. 전화를 건다.

“아 거기, 우체국 택배인가요? 물건이 잘못와서요. 반송하려는데요….”

– 안 써질때 억지로 쓰면 늘 이래요. @A-RA.COM –

호객꾼

“호루라기 필요없어요?”

토끼는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왔다. 쓸데없는 물건들을 줄줄이 읊으며 따라온게 100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다. 그녀의 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그녀는 손사레를치며 토끼에게서 멀어지려했다. 토끼는 지구끝이라도 쫓아갈 기세로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누나, 호루라기 진짜 필요없어요?”
“…….”
“있으면 엄청 좋은데. 호신용으로 최곤데.”
“…….”
“후회없음이야. 진짜루.”
“……”
“누나처럼 예쁜사람에겐 머스트 헤브 아이템이라니까.”

토끼에게 대꾸 하지 않고 계속 걷는다. 도대체가 말도 안되는 물건을 영업하는 토끼와 대화를 나눌 이유가 전혀 없는 그녀였다. 그러나 왜인지 그는 지치지 않고 끝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빠른 걸음을 따라잡으며 말을하려니 약간 숨이차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산은? 전에 써본거랑은 다를걸!?”
“……”

그녀는 토끼를 곁눈질로 흘끔 바라보았다. 호루라기?우산? 그 어떤것도 갖고 있지 않다. 손목에 바구니 하나가 들려있긴한데, 그마저도 초코파이만 가득이고 그냥 맨몸이잖아.

“이거 한 번 써본 사람은 다들 이 우산만 찾음! 절대 후회 안함! 이래도?”
“……”
“우산정도는 있어줘야 나쁜놈들 못보게 누나의 예쁜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 있을거 아냐?”
“……”
“아니면 진짜 호신용으로 때릴수도 있고. 어때, 완전 괜찮겠죠?”

그녀는 걷다가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토끼를 노려보며.

“아이씨. 뭐래는거야. 사람이 한 번 싫댔으면 싫은줄 알아야지.”
“……”

토끼와 그녀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토끼의 앞가슴에 붙어있는 코팅된 안내문이 펄럭인다. A형, O형 혈액형 급구. 왠지 등판에는 B형, AB형 급구 같은게 붙어 있을 것 같은 성의없는 안내문. 털이 복슬한 토끼 인형의 머리통안에서 더운 숨을 몰아쉬는 청년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래. 이런 날씨에 엄청 더워 죽겠지? 그러게 왜 따라오고 난리야.

“…..누나. 헌혈 하고 갈래요?”
“안 꺼지냐. 망할놈이.”

그녀는 토끼에게 욕을 갈기고는 뒤돌아서서 가버린다. 찜통처럼 더운 한낮의 보도블럭위에 분홍색 토끼 한마리가 눅진해진 초코파이 바구니를 들고 서 있다. 토끼는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나를 못 알아봐도 좋아보여서 다행이네.라고 중얼거린다. 그때는 너를 지켜주지 못하고 도망쳐서 미안해. 토끼는 그렇게 한참을 보도블럭위에 서 있었다.

– 페북에 올려보니, 내용을 영 이해를 못하는 분도 있군요. orz….. @A-RA.COM –

사랑만큼의 우정

방학식이 끝났다. 1학기 종료와 함께 내 우정도 끝났다. 세 명이 우정을 쌓으면 한 사람이 따돌려지기 마련인데, 사교성이 별로 없는 내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친구들의 절교선언은 세상이 끝나는 것만큼 어질어질한 기분이 들게 했다. 평생을 쌓아갈 우정이라고 해놓고 절교라니.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친구를 사귀는 일은 연애만큼이나 힘든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영화 ‘라붐’의 여주인공 ‘빅’처럼 청춘을 불사르는 열다섯이 되었으니,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 질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엄마가 억지로 보내는 보습학원과 방학숙제가 기다릴 뿐.

“여름방학 잘 보내.”

울것 같은 기분과 알 수 없는 분노속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채 하교를 준비하는 나에게 누군가 새 연필 한 자루를 내밀었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여드름 많고, 사각턱인 애. 김하정이다. 말도 엄청 느린 애다. 

“뭔데?”
“그냥…. 방학식 기념으로 주고 싶어서.”

그 애, 손 끝을 떨고 있다. 내 우정은 결단났고, 지금 엄청 기분이 별로라고…. 왜 이런 엉망진창의 방학식을 기념한다는거야? 게다가 그렇게 촌스런 그림이 그려진 연필을 대체 누가 쓴다는거야. 우린 중학생이라고…

“초딩이냐? 연필을 쓰게.”

연필을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마음이 파괴되어 이성이 마비된 나에게 이상한 말 좀 걸지 말란 말이야. 학교도, 김하정도 다 꼴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여름방학은 엄마가 이미 보습학원을 예약해둔 상태라 파괴된 우정같은걸 길게 붙잡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힌다. 우정이 휘발된 여름방학은 몹시도 건조하고 길었지만, 내 생활은 단조롭기 그지 없다. 어째서 영화 ‘라붐’의 여주인공 ‘빅’처럼 대단한 로맨스가 생기지 않는걸까. 우정이 부서졌으면 사랑이라도 찾아와야하지 않나.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학원을 마친 어느날 집으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나야. 김하정. 놀랐지? 방학 어떻게 보내고 있니? 궁금해서.
있잖아. 연필. 그거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서 준건데. 받지 않아서 조금 창피했어.
그런데 괜찮아. 남은 방학 잘 보내고 개학식날 보자. 안녕 …’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연필을 거절한 나의 바보같은 말이 떠올라서 괴로웠고, 내 마음을 속이고 동정심으로 친구를 사귀려니 더욱 괴로웠다. 답장을 몇 번이나 쓰다 찢었다. 이제 난 중학생이라서 연필을 쓰지 않는다고. 적어도 네가 그정도는 알아둬야 친구가 될 수 있는거 아니냐고. 우정을 쌓는 일이 연애만큼이나 어려운 이유는 연필을 받는다고 친구가 사귀어지는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고쳐쓰는 답장에 허세의 밤은 깊어갔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우정만이 파괴된 열다섯의 여름방학이었다.

–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문장은 전혀 나아지지 않네요.@A-RA.COM –

전학생

짝꿍은 책받침으로 입을 살짝 가린채로 말했다. 이전 학교에서 사고를 쳐서 퇴학을 당한 애라고.

“너도 쟤랑은 말 안 섞는게 좋을걸.”

쉿. 듣겠다. 그제서야 잦아드는 짝꿍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학생은 3분단과 4분단 사이 복도를 도도한 표정으로 지나간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정수리까지 올려 묶은탓인지 눈이 미묘하게 치켜올라가 인상은 더욱 사나워보였다. 그렇게까지 올려 묶었는데도 긴머리는 타박타박 걸을때마다 팔꿈치에서 찰랑인다.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이상한 애다.

수업이 끝나자 그 애는 느릿느릿 가방을 꾸렸다. 짝꿍은 나 오늘 피아노 렛슨있어. 내일 봐!하고는 뒷문으로 금새 사라졌다.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아니, 호기심일까? 느릿느릿 가방을 챙기는 그애에게

“야, 너네 집 냉정골이지?”
“그건 왜?”
“나도 버스 거기서 내리거든. 같이가자고. “

어쩌라고. 그런 표정. 관심없다는 듯 가방을 메고 교실문을 나서는 그 애. 실패다.

– 쓰기 중단 @A-RA.COM –

전사(轉寫)하던 노인

20대의 어느 여름. 알바를 한참 구하던 때여서 몇 군데에 면접을 본 날이었다. 이미 오후 느즈막한 시간이었지만 날은 여전히 더웠고 마지막으로 면접 장소는 찾아가기도 힘든 외진 곳에 있었다. 몇 번이나 전화 통화를 하면서 위치를 물어물어 알아냈는데 비좁은 주택가 골목 사이에 허름한 시멘트 건물이 나타났다. 오래된 70년대식 가정집이었다. 열기를 식히려고 물을 뿌려둔 젖은 마당을 지나, 반쯤 열린 현관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부엌에서 무언가를 하던 50대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한걸음에 달려나와 ‘아까 전화한 학생인가요?’ 하면서 반겨주었다. 그녀가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가는 동안 둘러본 실내는 온통 전시된 판촉물 천지였다.

– 쓰기 중단 @A-RA.COM –

닥터 에이전트 (Dr. Agent) – 1

퇴근길 전철역 계단에는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나오고 들어가고 있다. 출입구까지 나가는 길은 걸어간다기보다 휩쓸려 간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계단을 헛딛지 않으려 바닥을 보고 걸었지만, 앞사람에 가려 좁아진 시야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을, 더구나 인상착의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출구를 겨우 빠져나와 약속장소인 K어학원 간판을 찾아보았다. 50m쯤 떨어져 있을까, 간판은 떨어져나가고 벽면에 K어학원이라는 글자의 흔적만 남아 있는 건물이 보였다. 어학원 1층이라고 했는데, 이런 공사중인지 중단된건지 하는 곳에서 보자는거였나. 누군가의 장난일까? 아니면 어떤 무서운 일에 휘말린걸까? 눈치를 보면서 문앞을 서성였다. 슬슬 겁이나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1시간을 걸려 이 곳에 온 걸 생각하니 선뜻 돌아설 수도 없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결행하지 못할 일. 부탁을 못하게 되거나, 장난질을 당하거나 별 차이는 없었다.

기왕 왔으니 건물안에 들어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테이프가 발라진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명패가 덜렁거리는 수강 접수대, 먼지가 뿌옇게 앉은 탁자 하나와 녹슨 사무용 의자가 두어 개가 놓여있는 휑한 공간. 전기공사를 하느라 뜯어낸 천장 덕에 음산한 느낌까지 든다. 고개를 돌려 들어왔던 쪽을 바라보았다. 뿌연 유리문 바깥으로 보이는 퇴근길의 인파는 이 곳과 어울리지 않는 대조적인 광경이다. 끝없이 떠밀려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의자의 먼지를 털어내고 앉았다.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알 수 없는 사람과의 알 수 없는 거래. 불안한 마음으로 지갑속의 명함을 꺼내보았다.

 

해결사

김대리 : 010 – XXXX – XXXX

꼭 하셔야 하는 일에 다만 용기가 없어서 망설이고 계시다면 주저하지 말고 전화주십시요.
그것이 무슨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테니까요.
기회는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 이 기회 카드를 사용하지 않을시에는 반드시 폐기하여 주십시요.

반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깔끔한 느낌을 주는 이 명함에는 희미하게 Chance card라는 워터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명함을 다시 지갑안에 넣었다. 1분이 1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그가 오기전에 여길 빠져나가야 하나? 기다려야 하나? 마치, 간헐적인 치통에 시달리다가 통증이 잠잠해진 틈에 치과에 가는 기분이랄까. 치과 입구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그 짧은 시간의 갈등이 계속되는 것 같다. 불안은 온 몸에 스며들고 있었다. 잠시후, 뿌연 유리밖에 한 남자가 이 쪽으로 성큼 성큼 걸어오는가 싶더니 불쑥 문을 열고 들어섰다.

– 의뢰인이시죠?

말쑥한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 텅 빈 공간이라 그의 목소리가 울려 들린다. 먼 곳의 실루엣은 평범한 영업 사원같아 보였다. 뚜벅 뚜벅 발소리를 울리며 내 쪽으로 걸어온 그는 생각보다 더 젊었다. 가까이서 본 그는 이십대 중후반 정도의 나이에 첫 눈에도 호감을 가질만큼 선한 얼굴이었기에 불안했던 마음이 약간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 처음 뵙겠습니다. 김대립니다.
– 아, 네… 안녕하세요.
– 약속장소가 이래서 놀라셨을겁니다.
  일의 보안상 눈에 띄지 않기위해 일부러 혼잡한 역을 골랐는데, 그러다보니 막상 이야기를 나눌 곳이 마땅찮더군요. 이 곳이 아무래도 보수공사중이라 아무도 없으니 최적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준비된 답을 쏟아내는 그의 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캐묻는다면 무기력한 나는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내가 앉은 맞은편 의자의 먼지를 털어내고 앉았다.

–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명함은 어떻게 얻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가 착한 눈웃음을 지어보이자 마음은 훨씬 안정이 되었지만, 오히려 머릿속은 백지가 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아, 저런. 너무 긴장하셨나보군요.
  겁먹지 마세요.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추궁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 주..주웠어요. 출근길에…
– 누군가 폐기하지 않고 바닥에 버린 모양이네요. 흠…
  뭐 그건 의뢰인님의 잘못이 아니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요.

그는 잠깐 턱을 괴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그렇다면, 정확한 설명서도 못 받아보셨겠군요?
– 네.

흐음하고 짧은 신음을 토해낸 그는 무언가 마음을 먹은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 제가 그동안 했던 일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사랑을 고백할 용기가 없는 분이라든가, 허락받을 일을 부모님에게 말씀드릴 방법을 모르는 분,
  화해하고 싶은 친구가 계셨던 분 등등이 있습니다. 모두 자신감 결여 상태였다고 볼 수 있죠.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명함만 보고 연락하셨다면 아마 저에게 용기를 얻을 일이 필요하셨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팔짱을 끼고 설명하는 그의 팔꿈치에 묻은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여유를 잃지 않는다. 나는 그의 정체와 이 거래의 목적이 궁금해졌다.

– 제가 아는 건…. 당신의 직함과 하는 일인데…
– 그렇죠.
– 제가 도움을 받으면… 비… 비용은 어떻게 계산하나요?

역시나 내 질문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품안에서 계산기를 꺼내들었다.

– 돈은 필요없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흥정하게 될겁니다.
– 시.. 시간이요?

시간을 어떻게 지불한다는 거지? 웬 미친놈에게 걸려 들었나? 그러기엔 너무 멀쩡하게 생겼고… 아까의 우려대로 단순한 장난일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 무엇을 의뢰하시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려운 것일 수록 많은 시간을 지불하셔야 할겁니다.
– 만약.. 응한다면 제 시간을.. 어.. 어떻게 지불하나요?

네 놈이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 시간을 가져갈 건지 한 번 얘기해보시지.

– 지불하는 것은 제가 늘 하는 일이니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을 지불하시게 되면 당연히 그만큼의 수명이 줄어들겠지요.
  내키지 않으시면 지금 그만두십시요. 명함을 돌려주시면 없던 일로 해드리죠.
  어떻게 하실건가요?

– 다시 고쳐쓰여질지 모르는 이야기 @A-RA.COM –

# 4월에 시작한 글을 12월에 고쳐 쓰게 되었습니다.
  원래의 생각에서 많이 벗어나서 어떻게 해야할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연습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적고 있으니, 역시나 편안한 마음으로 질타 주십시요.
  언제든 다시 고쳐질 글이니까요. ‘ㅅ’)

100년 하고도 64년 후의 봄

계단 층계마다 융단처럼 돋아있는 이끼위로 따뜻한 햇볕이 쏟아진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때문에 정원은 마치 정글과 같았다.
노인은 의례 그랬듯 바깥으로 나와 나무 그늘에 앉았다.
그는 잠깐동안 건물 꼭대기의 다락방 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 생명체에게는 시간과 장소가 모두 중요하다면서요?
  시간과 장소의 강은 운명에 맞서는 것으로 건널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용도 해치웠고, 키스도 했는데 어째서 그녀는 깨어나지 않는겁니까? “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폐허속에서 노인은 나무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마 노인에게만 들리는 환청이 있는 듯 했다.
노인은 어느새 자신의 감정에 취해서 울먹이기 시작한다.

” 이 곳도 아니고, 지금 이 시간도 아니란 말인가요?
  이 끔찍한 시간의 길목을 지키고 서서 64년을 기다렸는데…. “

한동안 훌쩍거리다가 잠잠해진 그는 갑자기 일어나서
나무 그늘에 방치되어 있던 녹슨 검을 빼어들어 나무를 향해 돌진했다.
이제는 잡초도 베어지지 않을 것 같은 허술한 칼날은 깡!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 거짓말! “

온힘을 다해 나무에 부딪친 노인은 순식간에 녹초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귓가에 맴돌던 환청은 끝없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 자네에게 말해주지 못한 것이 있군.
    시간과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연이야….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말게….

다락방에 잠들어 있는 공주는 아직도 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노인은 어쩌면 그녀가 영영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백년이 아닌, 백만년 후의 누군가가 용도 없고, 마녀도 없는 이 곳에 왔다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시간과 장소가 충족되면 그녀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시간을 붙잡으려 자신의 시간을 다 쏟아붓고도
인연의 길목을 뒤틀어 용사가 되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시간들이
머릿속에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왔다가 사라진다.
이제 노인은 너무나도 졸리고 피곤했다.

모든게 끝났어… 말할 기운조차 없는 노인은 눈을 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은 노인은 금방이라도 땅속으로 꺼질것 같았다.
그리고 곧이어, 가을 바람처럼 선득한 차가운 손이 노인의 볼에 와 닿는다.

그는 힘겹게 눈을 떴다. 잠겨드는 시야에 환영이 보인다.
상상했던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공주가 걱정어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눈앞에 있는 그 모습의 실체가 진짜로 공주인지, 자신의 꿈인지 혼란스러웠다.
당신인지 당신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신이 깨어 있는 모습을 보긴 보게 되는군요..
라고 기운없이 속으로 중얼거린 노인은 3초간의 만남을 위한 64년의 기다림을 끝내게 되었다…

– 용을 해치운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A-R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