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화가 원작이라는 선입견때문에 관심이 없었던 그 영화.

이 영화를 우연히 틀었던 그 날은 이사가 끝나고 엉망진창인 집을 청소 해야했고, 치워야만 하는 상황과 치우기 싫은 마음이 갈등을 빚고 있는 상태였다. 사연없이 진행되는 음악방송 라디오 같은 것을 틀어두고 아주 아주 천천히 청소를 하고 싶었다. 기왕 큰 TV를 샀으니 들으면서 봐도 되는 그런 영화도 괜찮겠다 싶어서 한국 영화를 찾아보다가 쿠팡플레이에서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연속으로 3번을 보았다.

이 영화는 마치 일기처럼 독백으로 진행되는 요리 유튜브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계절과 이야기가 있다. 친구들과의 에피소드에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관계, 숨겨져 있던 어머니라는 인물에 대한 성격들도 나타난다.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서 알려주는 직설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혜원은 어린시절에 어머니가 밤조림을 해주셨던 일을 떠올리며 가을을 이렇게 소개한다. ‘밤 조림이 맛있다는 건, 가을이 깊어졌다는 뜻이다’라고. 그리고 집을 떠나는 겨울, 어린 혜원의 불평에 딴청 피던 어머니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는다. ‘곶감이 맛있다는 건, 겨울이 깊어졌다는 뜻이다’ 이런 표현들이 조각조각난 이야기들과 계절에 뒤섞여서 풍부한 느낌을 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미쌍관의 형식을 갖고 있는 것도 좋았다.

이제는 삶을 살아가며 좀 지치는 기분이 들 때마다 보고 싶어지는 영화가 될 것 같다. 영화를 보는내내 조금도 힘들지 않았고, 긴장도 없었지만, 지루함도 없었다. 오히려 마음은 충만해졌다.